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백광언(白光彦)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BC31AD11C5B8D1592X0
호(號)풍암(楓巖)
시호(諡號)충민(忠愍)
생년?(미상)
졸년1592(선조 25)
시대조선중기
본관해미(海美)
활동분야무신 > 무신
출신지태인(泰仁)

[상세내용]

백광언(白光彦)
미상∼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해미(海美). 호는 풍암(楓巖). 태인(泰仁) 출신.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당상관에 올랐으나 정여립(鄭汝立)의 권세가 높아지자 도내(道內)의 문무사류(文武士類)가 모두 이와 결탁하려 하였으나 그만이 동조하지 않아 미움을 받아 1589년(선조 22) 북청판관(北靑判官)으로 체직(遞職)되었다.

1592년 모친상을 당하여 태인에 머무르고 있는 중에 임진왜란을 만나 전라감사 겸 순찰사(全羅監司兼巡察使) 이광(李洸)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이때 이광이 전라도병사 8000명을 이끌고 공주까지 북상했다가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퇴군하여 전주에 이르자 백광언은 “군부(君父)께서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셨는데 공은 수하에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퇴군하여 싸우려 하지 않으니 이 무슨 연고이시오.”라고 꾸짖어 북상할 것을 약속받고 다시 2만여의 군사를 모아 전열을 재정비한 뒤 수원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용인성(龍仁城) 남쪽 10리에 이르러 우군선봉장이 된 그는 좌군선봉장 이지시(李之詩)와 함께 문소산(文小山)의 적진을 협공하였으나 패전하여 모두 전몰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면 여세를 몰아 서울을 수복할 것으로 기대하였던 행재소(行在所)에서는 패전소식을 들은 뒤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하였다.

1834년(순조 34)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모충사(慕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人物考

[집필자]

문수홍(文守弘)
대표명백광언(白光彦)
광언(光彦), 광언(光彥)
성명백광언(白光彦), 백광언(白光彥)

명 : "광언(光彥)"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14初洸到公州聞西狩遂退軍助防将自光彥曰退縮不赴有何意乎乃拔釰瞋目洸驚謝之
紀年便攷v18播越臣子固當挺身赴難公手握重兵退縮何意遂拔劒瞋目洸驚惶失措謝曰吾未深思耳此後惟公指揮乃更發勤王兵洸使光彥覘賊于龍仁還告道狹樹密不可輕進洸挾前憾以違令重杖幾危光彥憤曰寧為賊所殺遂褁瘡而起與李之詩搏戰而死古阜
紀年便攷v18措謝曰吾未深思耳此後惟公指揮乃更發勤王兵洸使光彥覘賊于龍仁還告道狹樹密不可輕進洸挾前憾以違令重杖幾危光彥憤曰寧為賊所殺遂褁瘡而起與李之詩搏戰而死古阜郡守李允仁咸悅縣監鄭淵等皆被害光彥贈兵判
紀年便攷v18白光彥水原人宣祖壬辰以助防將從全羅監司李洸為先鋒將由礪山渡錦江聞上西狩洸令軍中遂退還人心憤惋不平光彥見洸父播越臣子固當挺身赴難公手握重兵退縮何意遂拔劒瞋目洸驚惶失措謝曰吾未深思耳此後惟公指揮乃更發勤王
紀年便攷v18洸挾前憾以違令重杖幾危光彥憤曰寧為賊所殺遂褁瘡而起與李之詩搏戰而死古阜郡守李允仁咸悅縣監鄭淵等皆被害光彥贈兵判
國朝人物志v2汝立勢焰薰灼再三請見終不往爲北靑判官時重峯趙憲謫吉州知舊守令畏禍不見光彥獨具酒饌待之憲曰吾與公未嘗一面今何至此光彥曰中心所激不得不爾壬辰聞李洸罷兵馳到公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