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난영(朴蘭英)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B09CC601D1636X0 |
시호(諡號) | 충숙(忠肅) |
생년 | 1575(선조 8) |
졸년 | 1636(인조 1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고령(高靈)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상세내용]
박난영(朴蘭英)
1575년(선조 8)∼1636년(인조 14).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형백(馨伯). 본관은 고령(高靈).
선조 때 면천군수(沔川郡守)‧중군(中軍) 등을 거쳐, 1619년(광해군 11)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후금(後金)정벌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길잡이로 함께 들어왔다가 석방된 뒤, 회답관(回答官)‧선위사(宣慰使)‧선유사(宣諭使)‧추신사(秋信使)‧춘신사(春信使) 등으로 여러차례 심양(瀋陽)을 내왕하며 후금을 회유하는 데 힘썼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박로(朴𥶇)와 함께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잡혀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휘하의 청군 진영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청나라의 요구로 조정에서 능봉군(綾峰君)과 심집(沈諿)을 왕자와 대신으로 가장시켜 적진에 보내었는데, 마부대가 박난영에게 사실여부를 확인하자 그는 두 사람이 왕자‧대신임을 증언하였다가 곧 정체가 밝혀지자 청나라 군사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선조 때 면천군수(沔川郡守)‧중군(中軍) 등을 거쳐, 1619년(광해군 11)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후금(後金)정벌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길잡이로 함께 들어왔다가 석방된 뒤, 회답관(回答官)‧선위사(宣慰使)‧선유사(宣諭使)‧추신사(秋信使)‧춘신사(春信使) 등으로 여러차례 심양(瀋陽)을 내왕하며 후금을 회유하는 데 힘썼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박로(朴𥶇)와 함께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잡혀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휘하의 청군 진영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청나라의 요구로 조정에서 능봉군(綾峰君)과 심집(沈諿)을 왕자와 대신으로 가장시켜 적진에 보내었는데, 마부대가 박난영에게 사실여부를 확인하자 그는 두 사람이 왕자‧대신임을 증언하였다가 곧 정체가 밝혀지자 청나라 군사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燃藜室記述
[집필자]
조계찬(趙啓纘)
명 : "난영(蘭榮)"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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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0-04-21 | 趙性敎 撰 贈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行資憲大夫知中樞府事朴公諡狀을 참고하여, 생년 1575(선조 8 을해), 본관 고령(高靈), 자 형백(馨伯) 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