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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교(鄭敏僑)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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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계통(季通)
호(號)한천(寒泉)
생년1697(숙종 23)
졸년1731(영조 7)
시대조선중기
본관창녕(昌寧)
활동분야문학 > 시‧시조인
정차징(鄭次徵)
진주강씨(晉州姜氏)
외조부강사일(姜泗逸)
저서『한천유고』

[상세내용]

정민교(鄭敏僑)
1697년(숙종 23)∼1731년(영조 7). 조선 후기의 시인.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계통(季通), 호는 한천(寒泉).

부친은 첨지중추부사 정차징(鄭次徵)이며, 모친은 진주강씨(晉州姜氏)부호군 강사일(姜泗逸)의 딸인데 후처였다.

4남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시인 정내교(鄭來僑)의 동생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에는 내교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8세 때 “눈 녹으니 청산이 드러난다(雪盡見靑山).”라는 글을 지어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한때는 배천으로 가 독서를 하였으며, 29세 때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곧 그만두고 여항시인으로 행세하였다.

형을 이어 홍세태(洪世泰)의 문하로 들어갔는데 시재가 있어 당시 여항‧사대부 사이에 시로 이름이 있었다. 집이 궁핍하여 호남의 한천(寒泉)으로 내려가 농삿일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한천이라는 호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백성들의 생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기에 관계된 시작품이 다수 전한다.

그가 관서지방 안찰사 밑에서 세금걷는 일을 한 적이 있는데, 가난한 백성들에게 차마 세금내라고 할 수 없어 빈손으로 돌아오고는 하였다는 일화도 전한다.

그는 평생 공직에 오른 적은 없고 다만 남의 집 기실(記室)을 지낸 것이 고작이다. 홍석보(洪錫輔)는 그를 서기(書記)로 삼아 가까이하였으며, 영남백(嶺南伯)이었던 조현명(趙顯命)은 그를 객사에 머무르게 하고 함께 시를 수창하는 한편 자제교육을 맡기기도 하였다.

조현명의 객사에서 학질을 앓다가 35세로 요절하였다. 시 재능뿐 아니라 효행으로도 알려졌던 그가 죽자 당시 사림들은 가사(佳士)가 죽었다고 하였다.

저서로 『한천유고』 2권 1책이 전한다.

[참고문헌]

寒泉遺稿
柳下集
浣巖集
里鄕見聞錄

[집필자]

이상진(李相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