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상(南有常)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0A8C720C0C1B1696X0 |
자(字) | 길재(吉哉) |
호(號) | 태화(太華) |
생년 | 1696(숙종 22) |
졸년 | 1728(영조 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의령(宜寧)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남한기(南漢紀) |
증조부 | 남용익(南龍翼) |
외조부 | 심한장(沈漢章) |
출신지 | 서울 |
저서 | 『태화자고(太華子稿)』 |
[관련정보]
[상세내용]
남유상(南有常)
1696년(숙종 22)∼1728년(영조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길재(吉哉), 호는 태화(太華).(주1)
서울 출신.
증조조부는 대제학 남용익(南龍翼)이고, 부친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남한기(南漢紀)이며, 모친은 통덕랑(通德郞) 심한장(沈漢章)의 딸이다.
1713년(숙종 39) 진사가 되고, 1727년(영조 3) 성균시에 장원,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성균관에 입학할 때 장명유생(將命儒生)이 되고, 그해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춘추관기사관으로 『숙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실록랑(實錄郞)을 이어 수찬‧이조정랑을 지냈다.
1728년 소론(少論)의 영수인 이광좌(李光佐)를 배척하다가 당론을 일으켰다 하여 동료 신만(申晩) 등과 함께 영암에 유배되었다.
그뒤 곧 풀려나왔으나, 그해 병으로 일찍 죽었다. 재주가 높아 시문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뒤에 홍문관부수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태화자고(太華子稿)』가 있다.
호 |
『금릉집(金陵集)』 17권 "伯父太華先生墓誌銘" 및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참고. |
증조조부는 대제학 남용익(南龍翼)이고, 부친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남한기(南漢紀)이며, 모친은 통덕랑(通德郞) 심한장(沈漢章)의 딸이다.
1713년(숙종 39) 진사가 되고, 1727년(영조 3) 성균시에 장원,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성균관에 입학할 때 장명유생(將命儒生)이 되고, 그해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춘추관기사관으로 『숙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실록랑(實錄郞)을 이어 수찬‧이조정랑을 지냈다.
1728년 소론(少論)의 영수인 이광좌(李光佐)를 배척하다가 당론을 일으켰다 하여 동료 신만(申晩) 등과 함께 영암에 유배되었다.
그뒤 곧 풀려나왔으나, 그해 병으로 일찍 죽었다. 재주가 높아 시문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뒤에 홍문관부수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태화자고(太華子稿)』가 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雷淵集
國朝榜目
雷淵集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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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