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광필(林光弼)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84AD11D544B1682X0 |
자(字) | 중랑(仲郞) |
호(號) | 청오헌(聽悟軒) |
생년 | 1682(숙종 8) |
졸년 | 1743(영조 19)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평택(平澤)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임봉휘(林鳳輝) |
조부 | 임주석(林周錫) |
[관련정보]
[상세내용]
임광필(林光弼)
1682년(숙종 8)∼1743년(영조 1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중랑(仲郞), 호는 청오헌(聽悟軒).
임주석(林周錫)의 손자이며, 임봉휘(林鳳輝)의 아들이다. 음사(蔭仕)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이듬해 정언이 되고, 영조 때에 장령‧필선‧헌납‧사간‧보덕 등을 거쳐 승지에까지 이르렀다.
죽은 뒤인 1796년(정조 20) 대호군 이득신(李得臣)의 추천으로 청백리에 천거되었다.
특히, 정언으로 있을 때에는 각사(各司)의 이서(吏胥)의 수를 삭감할 것, 서쪽의 덕현(德峴)과 동쪽 30리의 승사(僧舍)를 철훼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고, 일을 안이하게 처리한 포도대장 이봉상(李鳳祥)과 행동이 비루한 정읍현감 이익형(李益炯)을 탄핵하여 교체시켰다.
1727년(영조 3) 대동혜청(大同惠廳)의 관리철저로 창고의 소루함이 없도록 상소하기도 하였고, 문학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담양의 구산사(龜山祠) 에 배향되었다.
임주석(林周錫)의 손자이며, 임봉휘(林鳳輝)의 아들이다. 음사(蔭仕)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이듬해 정언이 되고, 영조 때에 장령‧필선‧헌납‧사간‧보덕 등을 거쳐 승지에까지 이르렀다.
죽은 뒤인 1796년(정조 20) 대호군 이득신(李得臣)의 추천으로 청백리에 천거되었다.
특히, 정언으로 있을 때에는 각사(各司)의 이서(吏胥)의 수를 삭감할 것, 서쪽의 덕현(德峴)과 동쪽 30리의 승사(僧舍)를 철훼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고, 일을 안이하게 처리한 포도대장 이봉상(李鳳祥)과 행동이 비루한 정읍현감 이익형(李益炯)을 탄핵하여 교체시켰다.
1727년(영조 3) 대동혜청(大同惠廳)의 관리철저로 창고의 소루함이 없도록 상소하기도 하였고, 문학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담양의 구산사(龜山祠) 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正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신정희(申正熙)
대표명 | 임광필(林光弼) |
성명 | 임광필(林光弼) |
성명 : "임광필(林光弼)"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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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