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경(金龍慶)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6A9ACBDB1678X0 |
자(字) | 이견(而見) |
생년 | 1678(숙종 4) |
졸년 | 1738(영조 1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경주(慶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두정(金斗井) |
출신지 | 충청도 홍성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용경(金龍慶)
1678년(숙종 4)∼1738년(영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이견(而見). 충청도 홍성 출신. 부친은 김두정(金斗井)이다.
진사가 되어 성균관 유생으로 있다가, 1718년(숙종 4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거쳐 1720년(경종 즉위) 정언이 되었다.
이때 너무 관인하여, 왕으로부터 국론에 대한 올바르고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에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영조가 즉위한 뒤 문학‧지평‧수찬‧교리 등을 지내면서 소론의 처결과 노론 4대신(四大臣) 복작(復爵)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북평사를 거쳐 시독관으로 육진(六鎭)의 병폐를 정리하는 상소를 올려 시행하도록 하였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1731년 승지에 이어 대사간‧이조참의‧승지‧개성부유수를 역임하였다.
1738년 진하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성품은 매우 침착, 관인하였으며, 의리와 처세에 항상 조심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진사가 되어 성균관 유생으로 있다가, 1718년(숙종 4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거쳐 1720년(경종 즉위) 정언이 되었다.
이때 너무 관인하여, 왕으로부터 국론에 대한 올바르고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에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영조가 즉위한 뒤 문학‧지평‧수찬‧교리 등을 지내면서 소론의 처결과 노론 4대신(四大臣) 복작(復爵)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북평사를 거쳐 시독관으로 육진(六鎭)의 병폐를 정리하는 상소를 올려 시행하도록 하였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1731년 승지에 이어 대사간‧이조참의‧승지‧개성부유수를 역임하였다.
1738년 진하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성품은 매우 침착, 관인하였으며, 의리와 처세에 항상 조심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藥坡漫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藥坡漫錄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대표명 | 김용경(金龍慶) |
성명 | 김용경(金龍慶) |
성명 : "김용경(金龍慶)"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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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