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연석(安鍊石)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548C5F0C11DB1662X0 |
자(字) | 보천(補天) |
호(號) | 보만당(保晩堂) |
생년 | 1662(현종 3) |
졸년 | 1730(영조 6)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순흥(順興)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안중현(安重鉉) |
[관련정보]
[상세내용]
안연석(安鍊石)
1662년(현종 3)∼1730년(영조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보천(補天), 호는 보만당(保晩堂). 안중현(安重鉉)의 아들이다.
문장에 능하여 젊어서 생원‧진사에 뽑히었다.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임금에게 진강(進講) 중 민폐를 진언하고 이의 구제책을 주청(奏請)하였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김일경(金一鏡)일파의 왕세제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의 위해(危害)시도가 있자, 세제를 옹호하여 소론의 미움을 샀다.
그뒤 양산군수로 나아갔으나 사단(事端)이 생기어 어사(御史) 박문수(朴文秀)의 탄핵을 받아 진주에 유배되었다.
문장에 능하여 젊어서 생원‧진사에 뽑히었다.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임금에게 진강(進講) 중 민폐를 진언하고 이의 구제책을 주청(奏請)하였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김일경(金一鏡)일파의 왕세제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의 위해(危害)시도가 있자, 세제를 옹호하여 소론의 미움을 샀다.
그뒤 양산군수로 나아갔으나 사단(事端)이 생기어 어사(御史) 박문수(朴文秀)의 탄핵을 받아 진주에 유배되었다.
[참고문헌]
國朝榜目
藥坡漫錄
藥坡漫錄
[집필자]
반윤홍(潘允洪)
명 : "연석(鍊石)"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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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