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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李濟){2}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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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경인(景仁)
호(號)성곡(星谷)
생년1654(효종 5)
졸년1714(숙종 40)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영휘(李永輝)
외조부박정(朴炡)

[상세내용]

이제(李濟)
1654년(효종 5)∼1714년(숙종 4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인(景仁), 호는 성곡(星谷).

부친은 군수 이영휘(李永輝)이며, 모친은 대사헌 박정(朴炡)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박세당(朴世堂)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고, 1687년(숙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문음으로 관직에 나아가 시직(侍直)에 임명된 이래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정랑에 올랐다.

1699년의 식년문과에 장원하였고, 2년 후 승지에 발탁되어 3년간 재직하다가 1704년 충청도감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을 청하였다. 곧 황해도감사에 임명되어 외직에 나갔는데, 이때 궁장(宮庄)소속 관노(官奴)들의 횡포를 강력하게 저지시켜 민생을 안정시켰다.

이어서 승지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는데, 이때 시무책(時務策)10조를 올려 인사의 공정, 성균관운영의 혁신 등을 논하였다. 다시 승지이조참판을 거쳐 1710년에 평안도감사가 되었고, 2년 후 예조참판을 거쳐 대사간이 되자 과거의 부정 및 과옥문제(科獄問題)를 준열하게 논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삭직되었다.

이후 광주(廣州)전사(田舍)로 돌아가 경사(經史)의 연구에 몰두하다가, 관직이 복직되어 소환되었으나 곧 죽었는데, 당시의 대표적 청백리의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國朝榜目
晩靖堂文集
典故大方

[집필자]

장동익(張東翼)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