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세량(韓世良)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55CC138B7C9B1653X0 |
자(字) | 상오(相五) |
생년 | 1653(효종 4) |
졸년 | 1723(경종 3)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청주(淸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한익창(韓翊昌) |
조부 | 한중영(韓重英) |
[관련정보]
[상세내용]
한세량(韓世良)
1653년(효종 4)∼1723년(경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상오(相五). 한중영(韓重英)의 손자이며, 서령(署令) 한익창(韓翊昌)의 아들이다.
1699년(숙종 25) 직장(直長)으로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713년 중국사신이 되돌아갈 때 평양에 머무르면서 대접소홀을 문제삼아 행패를 부리자 중로문안사로 나갔으며, 이듬해 승지가 되었다.
그뒤 계속하여 왕의 측근에서 승지로 왕을 보필하였다.
1718년 여주목사로 나갔는데, 이때 사헌부로부터 재물을 탐한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이듬해 다시 승지가 되어 중앙으로 돌아온 뒤 1721년(경종 1) 분병조참의가 되었다. 이해 노론이 왕세제(王世弟: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자 소론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 등과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는 이 일로 노론의 강력한 반발을 받아 절도에 위리안치하라는 대간들의 탄핵이 있었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이해 공조참의가 된 뒤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
1699년(숙종 25) 직장(直長)으로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713년 중국사신이 되돌아갈 때 평양에 머무르면서 대접소홀을 문제삼아 행패를 부리자 중로문안사로 나갔으며, 이듬해 승지가 되었다.
그뒤 계속하여 왕의 측근에서 승지로 왕을 보필하였다.
1718년 여주목사로 나갔는데, 이때 사헌부로부터 재물을 탐한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이듬해 다시 승지가 되어 중앙으로 돌아온 뒤 1721년(경종 1) 분병조참의가 되었다. 이해 노론이 왕세제(王世弟: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자 소론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 등과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는 이 일로 노론의 강력한 반발을 받아 절도에 위리안치하라는 대간들의 탄핵이 있었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이해 공조참의가 된 뒤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景宗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이재범(李在範)
명 : "세량(世良)"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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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