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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金濡)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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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김담(金潭)
자(字)백우(伯雨)
호(號)수효선생(粹孝先生)
생년1652(효종 3)
졸년1693(숙종 19)
시대조선중기
본관상산(商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우석(金禹錫)
풍천임씨(豊川任氏)
조부김설(金卨)
증조부김덕함(金德諴)
풍산홍씨(豊山洪氏)
처부홍주국(洪柱國)
외조부임형백(任衡伯)
묘소장단(長湍) 송서면(松西面)

[상세내용]

김유(金濡)
1652년(효종 3)∼1693년(숙종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백우(伯雨), 호는 수효선생(粹孝先生).

성옹(醒翁) 김덕함(金德諴)의 증손으로, 조부는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김설(金卨)이고, 부친은 형조판서(刑曹判書) 김우석(金禹錫)이다. 어머니 풍천임씨(豊川任氏)이조정랑(吏曹正郞) 임장(任章)의 손녀이자, 승지(承旨) 임형백(任衡伯)의 딸이다. 부인 풍산홍씨(豊山洪氏)예조참의(禮曹參議) 홍주국(洪柱國)의 딸로, 2남 1녀를 두었다.

10세에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통달하였고, 1682년(숙종 8) 임술증광사마시(壬戌增廣司馬試)에 진사(進士) 3등으로 합격하였다. 1688년(숙종 14)에 이조판서(吏曹判書) 박세채(朴世采)가 시사(時事)를 논하는 차자(箚子)를 올렸다가 삭탈관직 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여러 신하들이 부당함을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그가 태학(太學)의 유생들과 함께 상소를 올리자 임금이 비답(批答)과 관작(官爵)을 내려주었다.

남달리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위독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드렸고, 1691년 여름에는 부친의 병환이 위중하자 침식을 전폐한 채 보살폈다. 몸을 돌보지 않고 아버지 상을 치르다가 1693년 9월 세상을 떠나 장단(長湍) 송서면(松西面) 선영 아래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司馬榜目
韓國民族文化大百科辭典
朝鮮王朝實錄

[집필자]

이미선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