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만(李宜晩)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758B9CCB1650X0 |
자(字) | 선응(善應) |
호(號) | 농은(農隱) |
시호(諡號) | 정정(靖貞) |
생년 | 1650(효종 1) |
졸년 | 1736(영조 12)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광주(廣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후징(李厚徵) |
5대조 | 이준경(李浚慶)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의만(李宜晩)
1650년(효종 1)∼1736년(영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선응(善應), 호는 농은(農隱). 충정공(忠正公) 이준경(李浚慶)의 5대손이며 이후징(李厚徵)의 아들이다.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사간원정언으로 있으면서 지방수령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체직되어 영해부사 등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708년 중앙정계로 복귀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이때 5개 조항의 잠계(箴戒)를 올려 숙종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10여년간을 홍문관에서 재직하다가 1722년(경종 2)에 승지로 발탁되었고, 이어 충청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를 거쳐 한성판윤에 이르렀다. 청렴결백한 것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죽었다. 시호는 정정(靖貞)이다.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사간원정언으로 있으면서 지방수령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체직되어 영해부사 등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708년 중앙정계로 복귀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이때 5개 조항의 잠계(箴戒)를 올려 숙종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10여년간을 홍문관에서 재직하다가 1722년(경종 2)에 승지로 발탁되었고, 이어 충청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를 거쳐 한성판윤에 이르렀다. 청렴결백한 것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죽었다. 시호는 정정(靖貞)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집필자]
우인수(禹仁秀)
성명 : "이의만(李宜晩)"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