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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복(吳始復)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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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초(仲初)
호(號)휴곡(休谷)
생년1637(인조 15)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동복(同福)
활동분야문신 > 문신
오정규(吳挺奎)

[상세내용]

오시복(吳始復)
1637년(인조 15)∼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중초(仲初), 호는 휴곡(休谷). 오정규(吳挺奎)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어 수찬정언지평교리이조정랑사인 등을 거쳐 1675년(숙종 1) 승지이조참판개성유수를 역임하고, 강릉부사가 되었다가 부임 전에 허적(許積)에게 아첨하였다 하여 1680년 경신대출척 때 파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조참판에 이어 한성판윤호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그는 경비부족을 메우기 위해 각도, 각읍의 채은처(採銀處)를 호조에서 관장하여 수세하도록 하였고, 왜에 면포예급문제, 각 아문의 둔전경영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듬해에는 이조판서 겸 수어사를, 이어 다시 호조판서가 되었으나 갑술옥사로 하옥, 유배되었으며, 1697년 풀려나와 우부빈객을 지냈다.

1701년 무고(巫蠱)의 옥사에 연루되어 대정현(大靜縣: 지금의 제주도)에 안치되었는데, 1712년 함평강진 등지로 이배되었다가 이듬해에 영해부(寧海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에 이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특히 글씨에 능하였고, 뒤에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顯宗改修實錄
肅宗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김갑주(金甲周)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