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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韓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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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징(仲澄)
호(號)만은(漫隱)
생년1619(광해군 11)
졸년1688(숙종 14)
시대조선중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한형길(韓亨吉)

[관련정보]

[상세내용]

한은(韓垽)
1619년(광해군 11)∼1688년(숙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징(仲澄), 호는 만은(漫隱). 인조참판을 지낸 한형길(韓亨吉)의 아들이다.

성장하면서 학업에 힘썼으며, 허후(許厚)허목(許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과거를 버리고 뜻을 경전(經傳)에 두었으며, 특히 『중용』을 중히 여겨 힘껏 공부하였다. 정태화(鄭太和)가 효행으로써 그를 조정에 천거하여 선릉참봉(宣陵參奉)을 받았으나 벼슬이 뜻에 맞지 않는다고 출사하지 않았다.

1675년(숙종 1) 이후 권고를 받고 남대(南臺)에 들어갔다가 1679년에 다시 지평장령집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동안 특별한 유시가 있었으나 병을 핑계로 정사(政事)에는 한마디도 언급함이 없었다.

평소에 명성이 높아 경신변국 이후 상신(相臣) 김수흥(金壽興)이후정(李后定) 등의 추천을 받는 등 자주 천거된 바 있다. 그의 논의와 씩씩한 기상은 소인배가 흉내낼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와같은 사람은 별도로 포상하여 풍속을 다스려야 한다고 하여 1685년부터 1687년까지 연이어 집의를 제수한 것이 여섯 차례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언젠가 문인(門人)이었던 감사 권흠(權欽)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사화(士禍)가 많아 유술(儒術)에 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단지 학문이 아직 미숙한데 이름을 앞서 퍼뜨리려고, 덕(德)도 미처 쌓지 못한데 책임이 먼저 무겁기 때문에 행동이 꺾이고 팔목잡힐 일을 저질러 간사하고 아첨하는 데 물들게 되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랴! 즉, 지금은 당론이 셋으로 나뉘어 예론(禮論)이 대단히 심하다. 필시 사람을 해치는 계기에 빠지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가 젊었을 때 당(堂)을 일휴(日休)라고 이름하였으나 허목만은(晩隱)이라 하여 서신을 보냈기에 그대로 이를 호로 하였다.

[참고문헌]

順菴集
燃藜室記述
號譜
人物考
輿地圖書

[집필자]

조정기(趙楨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