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세건(郭世楗)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CFDC138AC74B1618X0 |
자(字) | 공가(公可) |
호(號) | 무위자(无爲子) |
생년 | 1618(광해군 10) |
졸년 | 1686(숙종 12)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현풍(玄風)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저서 | 『무위당유고』 |
[상세내용]
곽세건(郭世楗)
1618년(광해군 10)∼1686년(숙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공가(公可), 호는 무위자(无爲子).
허목(許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무예를 익혔으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였고, 허목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고 인정을 받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분의(奮義)하여 서울로 올라갔으나, 화의의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숙종이 즉위하여 현종릉지문(顯宗陵誌文)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짓게 하자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1675년(숙종 1) 사옹원봉사(司甕院奉事)에 특임되었으나 사양하였고, 그뒤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가 되었다. 윤휴(尹鑴)의 천거로 형조좌랑에 이어 공조정랑을 지냈으며, 1676년에 봉직랑(奉直郞)으로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오르고 익산군수로 나아가 치적을 올렸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허적(許積)‧윤휴 등이 사사되자, 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온 지 2년 만에 죽었다.
저서로는 『무위당유고』가 있다.
허목(許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무예를 익혔으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였고, 허목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고 인정을 받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분의(奮義)하여 서울로 올라갔으나, 화의의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숙종이 즉위하여 현종릉지문(顯宗陵誌文)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짓게 하자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1675년(숙종 1) 사옹원봉사(司甕院奉事)에 특임되었으나 사양하였고, 그뒤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가 되었다. 윤휴(尹鑴)의 천거로 형조좌랑에 이어 공조정랑을 지냈으며, 1676년에 봉직랑(奉直郞)으로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오르고 익산군수로 나아가 치적을 올렸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허적(許積)‧윤휴 등이 사사되자, 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온 지 2년 만에 죽었다.
저서로는 『무위당유고』가 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无爲堂遺稿
无爲堂遺稿
[집필자]
박용규(朴龍圭)
명 : "세건(世楗)"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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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