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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길(權尙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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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정(子貞)
호(號)근리재(近裏齋)
호(號)남곡둔옹(南谷遯翁)
생년1610(광해군 2)
졸년1674(현종 15)
시대조선중기
본관안동(安東)
활동분야학자 > 유생
권찬(權瓚)
전의이씨(全義李氏)
외조부이겸익(李謙益)
저서『남곡선생문집』

[상세내용]

권상길(權尙吉)
1610년(광해군 2)∼1674년(현종 1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정(子貞), 호는 남곡(南谷)근리재(近裏齋) 또는 남곡둔옹(南谷遯翁).

부친은 증좌승지 권찬(權瓚)이며, 모친은 전의이씨(全義李氏)이겸익(李謙益)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9세 때 『주자원유편(朱子遠遊篇)』에 차운(次韻)을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등 약관에 벌써 그 재명이 서울에까지 퍼져 정태화(鄭泰和)옥당에 있을 때 포의(布衣)로 교우를 허락하고 한나라 가의(賈誼)당나라 왕발(王勃)에 비유하였다.

1635년(인조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1636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가를 수행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는데, 전세가 점차 급박해지자 최명길(崔鳴吉) 등이 화의를 주장함을 보고 그에 격분하여 그들을 참하여 대의를 고수할 것을 상소했으나 정원(政院)에서 반려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가 반려된 상소문을 안고 통곡하면서 나오자 정온(鄭蘊)이 그 글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이는 이 사람뿐이다.”라고 하였다. 굴욕적인 화의가 성립되고 마침내 성문이 열리자, 그는 바로 낙향하여 자식들에게 과거는 보지 말고 농사를 지으라고 권하였다.

그뒤 세속과는 인연을 끊고 오직 학문에 전념하여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을 읽어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닦았다. 그의 고고한 학문을 알아주는 이는 별로 없었으나 이휘일(李徽逸)이 알고 서로 심교를 맺어 오래도록 학문을 강마(講磨)하였다.

1661년(현종 2) 감사의 추천으로 남별전참봉(南別殿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도중 광릉 부근에서 멀리 삼전도비(三田渡碑)를 바라보고 비분을 참지 못하여 집으로 되돌아가서 스스로 ‘남곡둔옹’이라 자호하고 두문불출,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정주학에 관한 연구저술이 1천여편에 달하였다.

1817년(순조 17)에 이조참의의 진정으로 정경대부(正卿大夫)에 추증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남곡선생문집』이 있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廣瀨集
南谷先生文集

[집필자]

권오호(權五虎)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