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삼사(馮三仕)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48DC0BCC0ACB1607X0 |
자(字) | 유영(惟榮) |
생년 | 1607(선조 40) |
졸년 | 1672(현종 13)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임구(臨朐) |
활동분야 | 귀화‧유민 > 귀화인 |
부 | 풍수(馮秀) |
출생지 | 산동성(山東省) 청주부(靑州府) 임구현(臨朐縣) 부정리(富亭里) |
묘소 | 남양주 진접읍 팔야리 |
[상세내용]
풍삼사(馮三仕)
1607년(선조 40)∼1672년(현종 13). 조선 중기의 유신(遺臣). 본관은 임구(臨朐). 자는 유영(惟榮).
부친은 명나라 병부시랑(兵部侍郞) 도찰원부도어사(都察院副都御史) 풍수(馮秀)이다.
중국 산동성(山東省) 청주부(靑州府) 임구현(臨朐縣) 부정리(富亭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공손하고 검소했으며 모든 일에 의리가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 있을 때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한 것을 보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 대신에 풍삼사는 고향에서 학문에 진력하였는데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인 1636년에 산동성 일대에 큰 흉년이 들자 전답 등의 가산을 정리하면서까지 양곡을 마련하여 빈민구제에 적극적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일대의 지방민들이 크게 감탄하여 명망이 자자하였다.
그의 나이 32세가 되던 1638년에는 청의 병사들이 산동성에 침입하였는데, 의병을 소집하여 덕주(德州)를 굳게 지키고 항전하니 적들이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다. 이듬해에는 청병이 무성(武城)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이끌고 구원하러 갔으나 이미 지현(知縣) 이승방(李承芳)이 전사하고 군사들이 흩어져 달아나고 있었다. 이 때 그는 의병들에게 황급히 돌진하라는 명을 내리고 선두에 서서 진격해 들어가니 청병들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청병을 물리친 후 성의 주위에 호를 파고 제방을 구축하여 남천(南川)의 물을 대어 해자를 완성하는 등 방어를 철저히 하였다.
또 다시 의병을 이끌고 서공기(徐公器)의 요청대로 구원을 하기 위하여 출병하였으나, 수십 배나 많은 청병에 밀려 결국은 적에게 생포되었다. 그 후 그는 심양관에 억류당해 있다가 1645년(인조 23)에 봉림대군(鳳林大君) 일행을 따라 왕미승(王美承)‧황공(黃功)‧정선갑(鄭先甲)‧양복길(楊福吉)‧배삼생(裵三生)‧왕문상(王文祥)‧왕이문(王以文)‧유계산(柳溪山) 등 황명구의사(皇明九義士)들과 더불어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봉림대군을 따라 조선으로 들어온 그는 조양루 남쪽에 살았는데,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뒤에 부름을 받아 북벌계획에 자문을 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에 효종이 승하하자 그는 두문불출하고 항상 수심으로 살았다. 1672년 세상을 하직하였는데, 임종 시에 가솔들에게 “이제 명 황실이 다시 흥함을 보지 못하고 외국에 와서 죽으니 대역 죄인이다. 내가 죽으면 상복으로 염습하고 현훈과 장삼을 쓰지 말라”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묘는 남양주 진접읍 팔야리에 있다.
부친은 명나라 병부시랑(兵部侍郞) 도찰원부도어사(都察院副都御史) 풍수(馮秀)이다.
중국 산동성(山東省) 청주부(靑州府) 임구현(臨朐縣) 부정리(富亭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공손하고 검소했으며 모든 일에 의리가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 있을 때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한 것을 보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 대신에 풍삼사는 고향에서 학문에 진력하였는데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인 1636년에 산동성 일대에 큰 흉년이 들자 전답 등의 가산을 정리하면서까지 양곡을 마련하여 빈민구제에 적극적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일대의 지방민들이 크게 감탄하여 명망이 자자하였다.
그의 나이 32세가 되던 1638년에는 청의 병사들이 산동성에 침입하였는데, 의병을 소집하여 덕주(德州)를 굳게 지키고 항전하니 적들이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다. 이듬해에는 청병이 무성(武城)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이끌고 구원하러 갔으나 이미 지현(知縣) 이승방(李承芳)이 전사하고 군사들이 흩어져 달아나고 있었다. 이 때 그는 의병들에게 황급히 돌진하라는 명을 내리고 선두에 서서 진격해 들어가니 청병들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청병을 물리친 후 성의 주위에 호를 파고 제방을 구축하여 남천(南川)의 물을 대어 해자를 완성하는 등 방어를 철저히 하였다.
또 다시 의병을 이끌고 서공기(徐公器)의 요청대로 구원을 하기 위하여 출병하였으나, 수십 배나 많은 청병에 밀려 결국은 적에게 생포되었다. 그 후 그는 심양관에 억류당해 있다가 1645년(인조 23)에 봉림대군(鳳林大君) 일행을 따라 왕미승(王美承)‧황공(黃功)‧정선갑(鄭先甲)‧양복길(楊福吉)‧배삼생(裵三生)‧왕문상(王文祥)‧왕이문(王以文)‧유계산(柳溪山) 등 황명구의사(皇明九義士)들과 더불어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봉림대군을 따라 조선으로 들어온 그는 조양루 남쪽에 살았는데,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뒤에 부름을 받아 북벌계획에 자문을 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에 효종이 승하하자 그는 두문불출하고 항상 수심으로 살았다. 1672년 세상을 하직하였는데, 임종 시에 가솔들에게 “이제 명 황실이 다시 흥함을 보지 못하고 외국에 와서 죽으니 대역 죄인이다. 내가 죽으면 상복으로 염습하고 현훈과 장삼을 쓰지 말라”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묘는 남양주 진접읍 팔야리에 있다.
[참고문헌]
日省錄
南楊州市誌
南楊州市誌
[집필자]
김영진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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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