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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주(鄭叔周)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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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정(子楨)
생년1607(선조 40)
졸년1665(현종 6)
시대조선중기
본관영일(迎日)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첨(鄭瞻)
출신지전주

[상세내용]

정숙주(鄭叔周)
1607년(선조 40)∼1665년(현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자정(子楨). 전주 출신. 정첨(鄭瞻)의 아들이다.

김동기(金東起)김문원(金文元)의 문인이다.

광해군인목대비(仁穆大妃)유폐사건이 있자 세상을 비관하다가 인조반정 이후 29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뒤 병자호란 때에는 동지들을 모아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뜻을 가졌는데, 국록을 먹으면서 자기와 자기 처자만 보호하는 것을 개탄하는 격문을 돌려,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하였다. 이익달(李益達)과 함께 전라북도 완주군(完州郡) 삼례역(三禮驛)에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으나,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 서인인 그는 1653년(효종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왕실과 인척되는 부관(府官)이 횡자(橫恣)를 하고 토호들도 그에게 아첨하여 비석을 세워 칭송하므로, 그것을 미워하여 친구들과 더불어 자주(字註)로써 그 부관을 비꼬았다.

그 결과 승문원성균관전사시(典祀寺) 등의 한직에서만 맴돌았다.

그뒤에 남인 허적(許積)이 물러나자, 전적감찰예조좌랑병조좌랑 등의 요직과 보령강진순천 등의 현감, 제주판관 등을 역임하면서 이속(吏屬)들에게는 엄하게 하고 백성들에게는 사랑으로 대하였다.

연로한 뒤에는 사우(士友)들과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의리를 강설하다가 59세에 죽었다.

높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하였으나 사림적(士林的)인 도학에 바탕을 두고 백성들을 사랑하였으며, 의리를 중히 여겼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