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홍석기(洪錫箕)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D64DC11DAE30B1606X0
자(字)원구(元九)
호(號)만주(晩州)
시호(諡號)효정(孝定)
생년1606(선조 39)
졸년1680(숙종 6)
시대조선중기
본관남양(南陽[唐])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이중(洪頤中)
외조부남충원(南忠元)
출신지경상남도 고성
저서『만주집』

[상세내용]

홍석기(洪錫箕)
1606년(선조 39)∼1680년(숙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唐]). 자는 원구(元九), 호는 만주(晩州). 경상남도 고성 출신.

부친은 생원 홍이중(洪頤中)이며, 모친은 현감 남충원(南忠元)의 딸이다. 구서봉(具瑞鳳)의 문인이다.

1627년(인조 5) 진사시에 합격하여 장릉참봉(章陵參奉)이 되고, 1641년 호조좌랑으로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병조좌랑을 거쳐 정언이 되었다.

1645년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다가 해운판관(海運判官)으로 좌천되고, 1654년(효종 5) 예조정랑으로 다시 기용되어 문신정시(文臣庭試)에 급제하여 인동부사(仁同府使)로 임명되었다.

1656년 성천부사(成川府使)양재찰방(良才察訪)을 거쳐, 1659년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그곳의 문교(文敎)에 힘을 기울여 사풍(士風)을 크게 진작시켰다.

1665년(현종 6) 해주목사, 1667년 서천군수, 1669년 영광군수를 역임하였으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그뒤 남원목사로 임명되어 임기를 마친 뒤 청주에 자리잡고 여기에 후운정(後雲亭)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후운정은 최치원(崔致遠)이 세상의 명리(名利)를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산 높은 뜻을 잇기 위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는 이곳에 머무르면서 화양(華陽)에 와 있는 송시열(宋時烈)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시사를 담론하기도 하였다.

그는 늙어서 나라를 걱정하였고, 세상사가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늘 시를 써 울적한 심정을 표현하고는 하여 그 시가 수백편에 이르렀다. 병중에서도 나라를 걱정하여 수천언에 이르는 상소문을 지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만주집』『존주록(尊周錄)』이 있다. 시호는 효정(孝定)이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孝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김갑주(金甲周)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