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지(尹衡志)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24D615C9C0B1604X0 |
자(字) | 경가(景可) |
생년 | 1604(선조 37) |
졸년 | 1634(인조 12)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남원(南原)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윤길(尹) |
[관련정보]
[상세내용]
윤형지(尹衡志)
1604년(선조 37)∼1634년(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가(景可).
관찰사 윤세림(尹世臨)의 후손으로, 승지 윤길(尹)의 아들이다. 김류(金瑬)에게서 수학하였다.
1624년(인조 2) 증광 생원시에 장원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강화까지 호종하였으며, 청의 위협으로 조정에서 화의 하자는 주장이 강할 때 그는 척화의 소(疏)를 올렸다. 이어서 윤황(尹煌)‧윤지경(尹知敬)도 척화의 상소문을 올리니 삼윤(三尹)의 정기(正氣)라고 칭찬하였다.
1629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승문원박사‧봉상시직장을 역임하고, 1630년 사관(史官)으로 천거되었으나 반대파의 저지로 밀려났다.
관찰사 윤세림(尹世臨)의 후손으로, 승지 윤길(尹)의 아들이다. 김류(金瑬)에게서 수학하였다.
1624년(인조 2) 증광 생원시에 장원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강화까지 호종하였으며, 청의 위협으로 조정에서 화의 하자는 주장이 강할 때 그는 척화의 소(疏)를 올렸다. 이어서 윤황(尹煌)‧윤지경(尹知敬)도 척화의 상소문을 올리니 삼윤(三尹)의 정기(正氣)라고 칭찬하였다.
1629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승문원박사‧봉상시직장을 역임하고, 1630년 사관(史官)으로 천거되었으나 반대파의 저지로 밀려났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조계찬(趙啓纘)
성명 : "윤형지(尹衡志)"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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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