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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승(金德承)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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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가구(可久)
호(號)소첩(巢睫)
생년1595(선조 28)
졸년1658(효종 9)
시대조선중기
본관김해(金海)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진선(金盡善)

[상세내용]

김덕승(金德承)
1595년(선조 28)∼1658년(효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가구(可久), 호는 소전(少) 또는 소첩(巢睫).

부친은 의금부도사 김진선(金盡善)이다.

1617년(광해군 9) 진사가 되고, 161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등용되었다. 중국어에 능하였으므로 예조좌랑 때 한어교수(漢語敎授)를 겸직하였다.

예조정랑필선(弼善)을 거쳐 1625년(인조 3)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629년에는 해운판관(海運判官)이 되어 전주 등 다섯 고을에서 직납을 원하지 않는 이유를 들어 조운(漕運)의 폐를 상소하였다.

이듬해 지평(持平)이 되고 이어서 장령을 거쳐 1634년 헌납(獻納)이 되었다.

이때, 1617년 생원시의 장원 이영구(李榮久)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을 상소하면서 그와 함께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을 도용하여 연명으로 하였으므로, 그의 이름도 들어 있어 문제가 되기도 하였으나 무고임이 밝혀져 무사하였다.

1635년에 다시 장령이 된 뒤 사예(司藝)상례(相禮) 등을 지내고, 사복시정(司僕寺正)목사(牧使)에 이르렀다.

경사 외에도 운서(韻書)를 깊이 연구하였고 그림에 능하였으며, 군서(群書)를 연구하여 성력제가(星曆諸家)에도 조예가 깊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東國文獻畵家編

[집필자]

조계찬(趙啓纘)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