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지(任器之)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84AE30C9C0B1586X0 |
자(字) | 국화(國華) |
호(號) | 신곡(薪谷) |
생년 | 1586(선조 19) |
졸년 | 1656(효종 7)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풍천(豊川)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임전(任錪) |
조부 | 임윤신(任允臣) |
증조부 | 임정(任楨) |
외조부 | 윤자신(尹自新) |
[관련정보]
[상세내용]
임기지(任器之)
1586년(선조 19)∼1656년(효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국화(國華), 호는 신곡(薪谷). 임정(任楨)의 증손으로, 조부는 감사 임윤신(任允臣)이고, 부친은 참봉 임전(任錪)이며, 모친은 윤자신(尹自新)의 딸이다. 이정귀(李廷龜)와 신흠(申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생원‧진사시에 모두 장원을 하였고, 그 뒤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성균관 재학 중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을 주장하는 소를 올렸다.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예문관겸열이 되었으며, 검열 재직중 문한(文翰)의 자질을 갖춘 인물로 이이첨(李爾瞻)의 추천을 받았다.
그 뒤 대교를 거쳐, 1620년(광해군 12)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었으며, 이어 정언‧이조좌랑‧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이첨의 친아들과 다름없을 정도로 심복이었으며, 유생 때부터 폐모를 주장하는 등 흉악함이 극에 달했다는 이유로 언관의 탄핵을 받아 멀리 유배되었다.
1628년(인조 6) 반역을 도모한 유효립(柳孝立)의 옥사에 관련되어 경원(慶源)으로 다시 유배되어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다. 이듬해 후금(後金)과 통하여 역모를 꾀한 양경홍(梁景鴻)사건에 관련되어 추국을 받은 뒤 영암(靈巖)으로 유배되었으며, 1631년(인조 9) 홍산(鴻山)으로 옮겨졌다가 1633년(인조 11) 석방되었다.
1616년(광해군 8) 생원‧진사시에 모두 장원을 하였고, 그 뒤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성균관 재학 중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을 주장하는 소를 올렸다.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예문관겸열이 되었으며, 검열 재직중 문한(文翰)의 자질을 갖춘 인물로 이이첨(李爾瞻)의 추천을 받았다.
그 뒤 대교를 거쳐, 1620년(광해군 12)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었으며, 이어 정언‧이조좌랑‧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이첨의 친아들과 다름없을 정도로 심복이었으며, 유생 때부터 폐모를 주장하는 등 흉악함이 극에 달했다는 이유로 언관의 탄핵을 받아 멀리 유배되었다.
1628년(인조 6) 반역을 도모한 유효립(柳孝立)의 옥사에 관련되어 경원(慶源)으로 다시 유배되어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다. 이듬해 후금(後金)과 통하여 역모를 꾀한 양경홍(梁景鴻)사건에 관련되어 추국을 받은 뒤 영암(靈巖)으로 유배되었으며, 1631년(인조 9) 홍산(鴻山)으로 옮겨졌다가 1633년(인조 11) 석방되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仁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大東野乘
[집필자]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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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