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임도(趙任道)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70C784B3C4B1585X0 |
자(字) | 덕용(德勇) |
호(號) | 간송당(澗松堂) |
생년 | 1585(선조 18) |
졸년 | 1664(현종 5)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함안(咸安)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부 | 조식(趙埴) |
저서 | 『간송집』 |
[상세내용]
조임도(趙任道)
1585년(선조 18)∼1664년(현종 5).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덕용(德勇), 호는 간송당(澗松堂). 조식(趙埴)의 아들이다. 김중청(金中淸)‧고응척(高應陟)‧장현광(張顯光) 등을 사사하였다.
1604년(선조 37) 향시에 합격하였고, 그 이듬해인 21세 때 『관규쇄록(管窺瑣錄)』을 저술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 「거상대절(居喪大節)」 10조(條)를 써서 자손들이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으며, 또 아버지의 언행록인 『추모록(追慕錄)』을 지었다.
1614년에는 동당시(東堂試)에, 그 이듬해 향해(鄕解)에 합격하였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향인(鄕人)이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으나 신병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1634년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고, 1638년 『취정록(就正錄)』을 쓰고 그 이듬해 『김라전신록(金羅傳信錄)』을 편찬하였다.
1644년 『대소헌유사(大笑軒遺事)』를 찬하였으며, 1647년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임명되어 창녕까지 가다가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뒤 공조좌랑으로 임명되었으나, 노병으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사헌부지평에 증직되고, 함안의 송정서원(松汀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간송집』 7권 4책이 있다.
1604년(선조 37) 향시에 합격하였고, 그 이듬해인 21세 때 『관규쇄록(管窺瑣錄)』을 저술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 「거상대절(居喪大節)」 10조(條)를 써서 자손들이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으며, 또 아버지의 언행록인 『추모록(追慕錄)』을 지었다.
1614년에는 동당시(東堂試)에, 그 이듬해 향해(鄕解)에 합격하였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향인(鄕人)이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으나 신병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1634년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고, 1638년 『취정록(就正錄)』을 쓰고 그 이듬해 『김라전신록(金羅傳信錄)』을 편찬하였다.
1644년 『대소헌유사(大笑軒遺事)』를 찬하였으며, 1647년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임명되어 창녕까지 가다가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뒤 공조좌랑으로 임명되었으나, 노병으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사헌부지평에 증직되고, 함안의 송정서원(松汀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간송집』 7권 4책이 있다.
[참고문헌]
澗松集
[집필자]
이동길(李東吉)
성명 : "조임도(趙任道)"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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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