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홍(曺守弘)
[요약정보]
| UCI | G002+AKS-KHF_13C870C218D64DB1574X0 |
| 자(字) | 계의(季毅) |
| 호(號) | 사촌(沙村) |
| 생년 | 1574(선조 7) |
| 졸년 | 1608(선조 41) |
| 시대 | 조선중기 |
| 본관 | 창녕(昌寧) |
| 활동분야 | 문학 > 문인 |

| 부 | 조민중(曹敏中) |
| 조부 | 조세명(曹世明) |
| 증조부 | 조건(曹健) |

[관련정보]
[상세내용]
조수홍(曺守弘)
1574년(선조 7)∼1608년(선조 41). 조선 중기 문인. 자는 계의(季毅), 호는 사촌(沙村)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증조부는 조건(曹健)이고, 조부는 참봉(參奉) 조세명(曹世明), 부는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조민중(曹敏中)이며, 정곡(鼎谷) 조대중(曺大中)의 조카이다.
1606년(선조 39) 병오(丙午)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2등 1위로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인 1606년(선조 39)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5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를 지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인품이 뛰어났으며, 총명하여 경전(經典)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모두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홍범연의(洪範演義)』를 지어 성리학(性理學)으로 이름이 높았다. 1589년(선조 22)에는 사림(士林) 오현(五賢: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원통함을 풀어주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가 죽은 후 창석(蒼石) 이준(李埈)은 “이 사람의 불행은 나라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우리 유학(儒學)의 불행이다.”라고 하였다.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광덕리(廣德里) 늑정의 오현사(五賢祠)에 조흡(曺恰), 조대중(曺大中), 조수성(曺守誠), 조황(曺煌)과 함께 배향되었다.
증조부는 조건(曹健)이고, 조부는 참봉(參奉) 조세명(曹世明), 부는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조민중(曹敏中)이며, 정곡(鼎谷) 조대중(曺大中)의 조카이다.
1606년(선조 39) 병오(丙午)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2등 1위로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인 1606년(선조 39)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5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를 지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인품이 뛰어났으며, 총명하여 경전(經典)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모두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홍범연의(洪範演義)』를 지어 성리학(性理學)으로 이름이 높았다. 1589년(선조 22)에는 사림(士林) 오현(五賢: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원통함을 풀어주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가 죽은 후 창석(蒼石) 이준(李埈)은 “이 사람의 불행은 나라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우리 유학(儒學)의 불행이다.”라고 하였다.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광덕리(廣德里) 늑정의 오현사(五賢祠)에 조흡(曺恰), 조대중(曺大中), 조수성(曺守誠), 조황(曺煌)과 함께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문과방목
사마방목
오성지
화순향교지
화순군지
사마방목
오성지
화순향교지
화순군지
[집필자]
조양원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