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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증(兪晉曾)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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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이진(而晉)
호(號)목오(木塢)
생년1573(선조 6)
졸년1625(인조 3)
시대조선중기
본관기계(杞溪)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유대록(兪大祿)

[상세내용]

유진증(兪晉曾)
1573년(선조 6)∼1625년(인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이진(而晉), 호는 목오(木塢).

유대록(兪大祿)의 아들이며, 전라감사를 지낸 유석증(兪昔曾)의 동생이다.

1605년(선조 3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에까지 이르렀다. 광해군이 대비(大妃)를 폐할 때 정청(庭請)에 나아가 참례한 백관이 무려 780여명인데 그 명록 속에 정랑으로 참례하였다.

당시의 선비들이 그들 형제가 벼슬을 하게 된 계기를 변충길(邊忠吉)이라는 자의 덕으로 평하고 있었다.

변충길사복시(司僕寺)에서 말을 키우던 자인데, 그의 작은아버지인 참판 유대정(兪大禎)이 1610년(광해군 2)에 동지하절사(冬至賀節使)연경(燕京)에 갈 때 변충길을 군관으로 데리고 갔다.

천한 종이 연경에 가는 군관이 된 것도 전에 없는 일이었다. 광해군의 정치가 어지러울 때 변충길이 딸을 궁중에 바쳐서 군(君)의 사랑을 얻어 천한 신분으로서 횡성현감이 되었고, 유석증이 두번이나 나주목사가 된 것과 그가 승지가 된 것은 모두 변충길의 힘이라 하여 사론(士論)이 애석해하였다.

인조반정으로 그 딸은 죽임을 당하였고, 변충길은 벼슬을 폐하여 서인이 되었다.

이때 좌승지였던 그는 홍문관에서 논박되어 벼슬을 그만두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조정기(趙楨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