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존세(趙存世)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70C874C138B1562X0 |
자(字) | 선계(善繼) |
호(號) | 청호(聽湖) |
생년 | 1562(명종 17)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양주(楊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조지(趙摯) |
조부 | 사수(士秀) |
[관련정보]
[상세내용]
조존세(趙存世)
1562년(명종 17)∼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선계(善繼), 호는 청호(聽湖). 좌참찬 사수(士秀)의 손자로, 조지(趙摯)의 아들이다.
1582년(선조 15)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0년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예문관봉교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명종실록』 찬수에 참여하였다.
그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평양으로 몽진하자 왕을 호종하였으나, 왕이 평양을 떠나 의주로 간다는 말을 전해듣고 동료 네 사람과 밀의하여 사초(史草)를 불태우고 그곳에서 탈출하였다. 환도 후 그 죄과로 인하여 예문관검열직에서 파직당하였다.
그뒤 1599년 예문관대교에 복직되었고, 1604년 선천군수로 재직시에 평안감사로부터 포상대상자로 상신되었다.
2년 후 성균관사예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이이첨(李爾瞻)의 그늘에서 한성부우윤‧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장례원행판결사를 지냈으며, 1618년에는 공조참판이 되었다.
1582년(선조 15)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0년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예문관봉교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명종실록』 찬수에 참여하였다.
그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평양으로 몽진하자 왕을 호종하였으나, 왕이 평양을 떠나 의주로 간다는 말을 전해듣고 동료 네 사람과 밀의하여 사초(史草)를 불태우고 그곳에서 탈출하였다. 환도 후 그 죄과로 인하여 예문관검열직에서 파직당하였다.
그뒤 1599년 예문관대교에 복직되었고, 1604년 선천군수로 재직시에 평안감사로부터 포상대상자로 상신되었다.
2년 후 성균관사예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이이첨(李爾瞻)의 그늘에서 한성부우윤‧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장례원행판결사를 지냈으며, 1618년에는 공조참판이 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光海君日記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집필자]
이재호(李載琥)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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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