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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언(熙彦)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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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고한(孤閑)
생년1561(명종 16)
졸년1647(인조 25)
시대조선중기
활동분야종교 > 불교인
출신지함경북도 명천

[상세내용]

희언(熙彦)
1561년(명종 16)∼1647년(인조 25). 조선 중기의 고승. 성은 이씨(李氏). 호는 고한(孤閑). 함경북도 명천 출신. 승려가 의발과 가사를 주는 태몽이 있었다.

17세에 칠보산 운주사(雲住寺)에 들어가 이듬해 중이 되었고 18년 동안 경론(經論)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승려의 일대사(一大事)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모든 경론공부를 폐하고 덕유산으로 선수(善修)를 찾아갔다. 그에게 ‘법성원융(法性圓融)’의 뜻을 묻고 느낀 바가 있어 3년 동안 머무르면서 깊은 뜻을 터득하였다.

그뒤 언제나 누더기옷을 걸치고, 눈이 오는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머리가 길어도 개의치 않고 음식을 폐한 채 10여일씩이나 선정(禪定)에 들기도 하였다. 하루는 서울로 올라와 돈의문(敦義門)앞을 지나는데 10여명의 불량한 아이들이 “너는 도승이냐 걸식승이냐.”고 조롱하면서 모래를 파고 그 속에 묻었다.

우연히 신자가 지나다가 구해주었으나, 조금도 성내는 얼굴을 하지 않고 합장하며 “성불! 성불!”이라고만 하였다. 이를 본 아이들은 진짜 도승이라 감복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또, 사람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면 역시 합장하고 돌아가라고만 하였으며, 돌아가지 않을 때 몽둥이를 들어 내쫓고는 방문을 닫아걸고 앉아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주면 좋은 공양을 받을만한 덕이 없다고 하며 물리쳤고, 큰스님으로 떠받들면 존경받을만한 행적이 없다 하며 거절하였다. 다만 간절하게 법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법성원융’의 뜻을 설명하여 주었다.

1622년(광해군 14)에 왕이 광주(廣州) 청계사(淸溪寺)에서 재를 베풀고 그를 증사(證師)로 삼아 금란가사(金襴袈裟)를 내렸으나 재가 끝난 뒤 가사를 벗어놓고 몰래 도망하였다.

1642년(인조 20) 팔공산에 있을 때 왕명으로 서울로 가던 각성(覺性)을 만나 형제처럼 지냈고, 다시 가야산에 은거하였다.

1646년 각성과 함께 속리산으로 옮겨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1647년 11월 22일에 유해를 산속에 방치하여 짐승의 밥이 되게 하라는 유언과 함께 “빈 손으로 이 세상에 와서 특별히 지옥의 찌꺼기만 남겼구나(空來世上特作地獄滓矣).”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제자를 엄중히 가려 전법(傳法)하였기 때문에 제자로는 각원(覺圓)영주(永周)종열(宗悅)의 3명만 있었다. 제자들이 유언을 어기고 다비하였는데 정골(頂骨)이 튀어 소나무 가지에 걸렸다고 한다. 그의 정골을 팔공산가야산에 나누어 탑을 세웠고, 이듬해 봄에는 속리산에도 탑을 세웠다.

[참고문헌]

白谷集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李朝佛敎(高橋亨, 寶文館, 1929)

[집필자]

김위석(金渭錫)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