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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善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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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부휴(浮休)
생년1543(중종 38)
졸년1615(광해군 7)
시대조선중기
활동분야종교 > 불교인
김적산(金積山)
이씨(李氏)
출신지남원
저서『부휴당대사집』

[상세내용]

선수(善修)
1543년(중종 38)∼1615년(광해군 7). 조선 중기의 고승. 성은 김씨(金氏). 호는 부휴(浮休). 남원 출신.

부친은 김적산(金積山), 모친은 이씨(李氏)이다. 어머니가 신승(神僧)으로부터 원주(圓珠)를 받는 태몽을 꾸었으며, 어릴 때부터 비린내를 좋아하지 않았다.

20세에 부모의 허락을 얻어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신명(信明)의 제자가 되었고, 그뒤 부용(芙蓉)의 밑에서 수도하여 심요(心要)를 얻었다.

그뒤 덕유산가야산속리산금강산 등의 이름있는 사찰에서 더욱 수행정진하다가 서울로 가서 노수신(盧守愼)의 장서를 7년 동안 읽었다. 그의 필법은 왕희지체를 익혔는데, 사명당(四溟堂)과 함께 당대의 이난(二難)이라 불렸다.

그뒤 임진왜란이 일어나 덕유산 초암에 은신하고 있던 중 왜적 수십명을 만났다. 차수(叉手)를 하고 선 그의 앞에서 왜적이 칼날을 휘두르는 자세를 취하였으나, 그가 태연부동하게 있었으므로 왜적들이 대기(大奇)하여 절한 뒤 물러갔다.

그뒤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렀을 때 명나라 장수 이종성(李宗城)이 찾아와서 법문을 듣고 며칠 동안 옆에서 모셨다. 얼마 뒤 무주구천동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하루는 『원각경(圓覺經)』을 외우고 있을 때 큰 뱀이 나타나서 계단 아래에 누워 있었다. 『원각경』을 다 외운 다음 뱀에게 가서 한 발로 그 꼬리를 밟자 뱀이 머리를 들고 물러났다. 그날밤 꿈에 한 노인이 절하고는 “화상의 설법의 힘을 입사와 이미 고신(苦身)을 여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광해군 때는 두류산에 있었는데 어떤 미친 승려가 무고하여 투옥되었다가 무죄가 판명되어, 광해군이 내전으로 초빙한 다음 설법을 청하여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가사 한 벌과 푸른 비단장삼 한 벌, 푸른 비단바지 한 벌, 금강석 염주 하나와 진완(珍玩)을 주었다.

또, 봉인사(奉印寺)에 재(齋)를 설하여 그를 증명으로 삼았다.

1614년(광해군 6)에는 조계산에서 방장산 칠불암(七佛庵)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다음해 7월 제자 각성(覺性)에게 부법(付法)하였다. 그해 11월 1일 목욕을 한 다음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나이 72세, 법랍 57세였다. 제자들이 화장한 뒤 영골(靈骨)을 얻어 해인사송광사칠불암백장사(白丈寺) 등에 부도를 세웠으며, 광해군부휴당부종수교변지무애추가홍각대사선수등계존자(浮休堂扶宗樹敎辯智無礙追加弘覺大師善修登階尊者)라는 시호를 내렸다.

평생 신도로부터 받은 모든 시물(施物)을 하나도 남김없이 그 자리에서 나누어주어 스스로 가지는 일이 없었다.

문하에는 700여명의 제자가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벽암(碧巖)뇌정(雷靜)대가(待價)송계(松溪)환적(幻寂)포허(抱虛)고한(孤閑) 등이 있어 조선 중기의 불교계 11파 중 7파를 형성하였다.

특히, 그는 조선시대 최고의 고승인 서산대사의 사제로 전통적인 격외선(格外禪)을 계승하였고, 일념회기(一念回機)‧일념회광(一念回光)‧회광반조(回光返照)를 강조하여 임진왜란 이후의 불교계를 정비하였다.

저서로는 『부휴당대사집』이 있다.

[참고문헌]

白谷集(處能)
浮休禪師의 禪思想(金仁德, 韓國佛敎思想史, 圓光大學校出版部, 1975)

[집필자]

김인덕(金仁德)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