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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韓嶠)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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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앙(士昻)
호(號)동담(東潭)
생년1556(명종 11)
졸년1627(인조 5)
시대조선중기
본관청주(淸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한수운(韓秀雲)
5대조한명회(韓明澮)
공신호정사공신(靖社功臣)

[상세내용]

한교(韓嶠)
1556년(명종 11)∼1627년(인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앙(士昻), 호는 동담(東潭).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5대손으로, 직장 한수운(韓秀雲)의 아들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지리‧복서(卜筮)‧병략(兵略) 등의 학문을 두루 통달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으며, 그 공으로 벼슬길에 나가기 시작하여 사재감참봉예빈시주부군자감판관 등을 거쳐 죽산의흥현감을 역임하였다.

특히, 1594년에는 유성룡(柳成龍)의 추천을 받아 문인으로서는 특례로 훈련도감낭관에 임명되어 새로 들어온 중국의 전술서인 『기효신서(紀效新書)』의 강해(講解)를 받았다.

따라서, 명나라 진중에 자주 왕래하면서 명나라 장수들에게 질의하여 포(砲)‧검(劍)‧창(槍) 등 무기의 각종 새로운 기법을 터득하고 그림을 그려 책을 만든 다음 가르치게 하니, 이것이 뒷날의 종합무술교과서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普通誌)』의 근원이 된다.

광해군 때에는 곡산부사로 벼슬길에서 물러나 아차산(峨嵯山) 아래 광나루에 집을 짓고 은거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서원군(西原君)에 봉하여졌다.

1625년(인조 3)에는 서북방에 변고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상소를 통하여 그 예방책을 건의하였다. 유저로는 『동담집』『가례보주(家禮補註)』『홍범연의(洪範衍義)』『사칠도설寺(圖說)』『무예제보(武藝諸譜)』 등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仁祖實錄
西厓集
朝鮮名臣錄

[집필자]

김용국(金龍國)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