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세(張經世)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A5ACBDC138B1547X0 |
자(字) | 겸선(兼善) |
호(號) | 사촌(沙村) |
생년 | 1547(명종 2) |
졸년 | 1615(광해군 7)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흥덕(興德) |
활동분야 | 학자 > 유생 |
부 | 장급(張伋) |
생부 | 장건(張健) |
출생지 | 남원 |
저서 | 『사촌집』 |
[관련정보]
[상세내용]
장경세(張經世)
1547년(명종 2)∼1615년(광해군 7).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흥덕(興德). 자는 겸선(兼善), 호는 사촌(沙村). 남원 출생. 부친은 정랑 장건(張健)이며, 모친은 양공건(楊公健)의 딸이다. 종부(從父)인 장급(張伋)에게 입양되었다.
재질이 총명하여 5, 6세에 벌써 글을 해독할 줄 알았다. 주로 가학(家學)을 전해받은 그는 경사백가(經史百家)에 두루 통하고, 당송팔가(唐宋八家)의 맥을 이었으며, 따라서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일가를 이루었다.
사우관계로는 당시 덕행이나 문명으로 드날렸던 노진(盧禛)을 비롯하여 김복흥(金復興)‧양사형(楊士衡)‧최상중(崔尙重) 등을 들 수 있다.
1585년(선조 18) 생원이 되고, 1589년 43세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뒤, 교서관저작을 거쳐 1593년 공주제독관으로 있다가 얼마 뒤에 승문원박사로 옮겼다. 이어 공조‧예조의 좌랑을 거쳐 전라도도사로 나갔으며, 1602년에는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금구현령을 자청해 나갔다가 그 이듬해에 실정으로 인하여 그만두었다.
이후로 벼슬을 단념하고 시문을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작품으로 「정부사(征婦詞)」‧「상사곡(相思曲)」 등을 남겨 후세에 문명을 떨치기도 하였다.
특히, 광해군 때 지은 「유선사(遊仙詞)」나 이황(李滉)의 「도산육곡(陶山六曲)」을 모방하여 국한문으로 쓴 「강호연군가(江湖戀君歌)」는 그의 우국애군(憂國愛君)의 충정과 존주척륙(尊朱斥陸)의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1615년 69세로 죽어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는 『사촌집』이 전한다.
재질이 총명하여 5, 6세에 벌써 글을 해독할 줄 알았다. 주로 가학(家學)을 전해받은 그는 경사백가(經史百家)에 두루 통하고, 당송팔가(唐宋八家)의 맥을 이었으며, 따라서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일가를 이루었다.
사우관계로는 당시 덕행이나 문명으로 드날렸던 노진(盧禛)을 비롯하여 김복흥(金復興)‧양사형(楊士衡)‧최상중(崔尙重) 등을 들 수 있다.
1585년(선조 18) 생원이 되고, 1589년 43세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뒤, 교서관저작을 거쳐 1593년 공주제독관으로 있다가 얼마 뒤에 승문원박사로 옮겼다. 이어 공조‧예조의 좌랑을 거쳐 전라도도사로 나갔으며, 1602년에는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금구현령을 자청해 나갔다가 그 이듬해에 실정으로 인하여 그만두었다.
이후로 벼슬을 단념하고 시문을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작품으로 「정부사(征婦詞)」‧「상사곡(相思曲)」 등을 남겨 후세에 문명을 떨치기도 하였다.
특히, 광해군 때 지은 「유선사(遊仙詞)」나 이황(李滉)의 「도산육곡(陶山六曲)」을 모방하여 국한문으로 쓴 「강호연군가(江湖戀君歌)」는 그의 우국애군(憂國愛君)의 충정과 존주척륙(尊朱斥陸)의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1615년 69세로 죽어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는 『사촌집』이 전한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沙村集
谿谷集
頤齋集
湖南三綱錄
沙村集
谿谷集
頤齋集
湖南三綱錄
[집필자]
김동주(金東柱)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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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