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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익(曺好益)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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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우(士友)
호(號)지산(芝山)
시호(諡號)문간(文簡)
생년1545(인종 1)
졸년1609(광해군 1)
시대조선중기
본관창녕(昌寧)
활동분야문신 > 문신
조윤신(曺允愼)
출생지창원
저서『지산집』
저서『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
저서『가례고증(家禮考證)』
저서『주역석해(周易釋解)』
저서『역상추설(易象推說)』
저서『논위학지요(論爲學之要)』
저서『이기유석등변(理氣儒釋等辨)』
저서『대학동자문답(大學童子問答)』
저서『소황이두시가구주(蘇黃李杜詩家句註)』

[상세내용]

조호익(曺好益)
1545년(인종 1)∼1609년(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芝山). 창원 출생. 증좌참찬 조윤신(曺允愼)의 아들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5년(선조 8) 경상도도사 최황(崔滉)이 부임하여 군적(軍籍)을 정리할 때 그를 검독(檢督)에 임명하여 한정(閑丁) 50명을 독납(督納)하게 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거절하자 토호(土豪)라고 상주(上奏)하여 다음해 평안도 강동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계속 학문에 정진, 많은 후진을 양성하여 관서지방에 학풍을 진작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유성룡(柳成龍)의 청으로 풀려나와 금오랑(金吾郞)에 특별 임명되어 행재소(行在所)가 있는 중화로 달려갔다.

그뒤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군민(軍民)을 규합, 중화상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녹비(鹿皮)를 하사받았다. 이어 형조정랑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되고, 1593년 평양싸움에 참가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그뒤 대구부사성주목사안주목사성천부사 등을 역임하고, 1597년 정주목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4년 선산부사, 1606년 남원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永川)지봉서원(芝峰書院)도잠서원(道岑書院), 성천학령서원(鶴翎書院), 강동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지산집』『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가례고증(家禮考證)』『주역석해(周易釋解)』『역상추설(易象推說)』『논위학지요(論爲學之要)』『이기유석등변(理氣儒釋等辨)』『대학동자문답(大學童子問答)』『소황이두시가구주(蘇黃李杜詩家句註)』가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었으나, 뒤에 문간(文簡)으로 개시되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海東名臣錄
國朝人物考
潛谷遺稿

[집필자]

이장희(李章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