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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홍(楊洪)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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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심원(深源)
호(號)양호재(養浩齋)
생년1508(중종 3)
졸년1564(명종 19)
시대조선전기
본관남원(南原)
활동분야문신 > 문신
양공준(楊公俊)
조부양배(楊培)
증조부양자첨(楊子瞻)
고조부양연(楊淵)
순흥안씨(順興安氏)
처부안극함(安克諴)
외조부장충보(張忠輔)
출생지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동계면(東溪面) 구미리(龜尾里)
묘소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여산면(礪山面) 신양동(新陽洞)

[상세내용]

양홍(楊洪)
1508년(중종 3)∼1564년(명종 19). 조선 전기 문신. 자는 심원(深源)이고, 호는 양호재(養浩齋)이다.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동계면(東溪面) 구미리(龜尾里)에서 태어났다.

고조부는 양연(楊淵), 증조부는 양자첨(楊子瞻), 조부는 양배(楊培)이고, 부친은 양공준(楊公俊)이다. 부인은 안극함(安克諴)의 딸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33세의 나이로 1540년(중종 35) 경자식년생원시 3등 55위에 합격하고, 같은 해에 1540년(중종 35) 경자 별시 문과 병과 7위로 급제한 후 관직은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 등을 역임하였다.

1555년(명종 10)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재임하고 있을 때, 왜적들이 60척의 배에 나눠 타고 전라남도 영암(靈巖)강진(康津)해남(海南) 지역으로 침입해온 을묘왜란(乙卯倭亂)이 일어났는데 그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적들을 토벌하여 공훈을 세웠다.

노계(蘆溪) 김경희(金景熹)와 도의(道義)로 사귀고 종유(從遊)하였다.

자녀로 4남을 두었다. 묘는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여산면(礪山面) 신양동(新陽洞)에 자리하고 있다.

유물로는 교지 「양홍위통훈대부행청도군수자 가정38년2월초10일(楊洪爲通訓大夫行淸道郡守者嘉靖38年2月初10日)」와 「생원양홍문과병과제7인급제출신자 가정19년10월초9일(生員楊洪文科丙科第7人及第出身者嘉靖19年10月初9日)」가 보물 725-6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國朝文科榜目
蘆溪遺藁
옥천지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CD-ROM 司馬榜目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index.jsp)
남원양씨쌍매당중파(http://home.ptu.ac.kr/∼dhyang/yang-family/)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