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균(李均)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774ADE0FFFFB1452X0 |
자(字) | 형중(衡中) |
생년 | 1452(문종 2) |
졸년 | 1501(연산군 7)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한산(韓山)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계정(李季町) |
조부 | 이종선(李種善) |
증조부 | 이색(李穡) |
외조부 | 박수량(朴遂良) |
[상세내용]
이균(李均)
1452년(문종 2)∼1501년(연산군 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중(衡中). 고려 말의 명신 이색(李穡)의 증손으로, 조부는 개성유후사유후 이종선(李種善)이고, 부친은 이계정(李季町)이며, 모친은 사섬시주부 박수량(朴遂良)의 딸이다.
1477년(성종 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토관(檢討官)‧시독관(侍讀官)‧지평‧검상(檢詳)‧집의, 내섬시정[內贍寺正], 대사성‧부제학‧대사간‧병조참지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481년(성종 12)에 상평창(常平倉) 설치 논의 시에 창름(倉廩)과 부고(府庫)가 있는 것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 하여 그 방책을 말하였고, 또 성종이 응방(鷹坊)을 혁파하고서도 다시 해동청 등을 진상케 하라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1487년(성종 18)에는 도성의 정업원(淨業院) 폐지와 이사(里社)의 폐단, 승려의 여염(閭閻: 일반 백성들이 사는 곳) 출입 금지 등에 대하여 청하였다.
1493년에는 『경국대전(經國大典)』 외에 조례(條例)와 교령(敎令)이 번잡하여 다시 속록(續錄)을 편찬하고 수교(讐校: 다른 것과 대조하여 교정함.)하니, 이러한 번잡을 피할 것과, 임금의 도리는 대강(大綱)을 총괄할 뿐 너무 소소한 데 힘써 손상됨이 없어야 한다고 직언하였다.
나아가 1499년(연산군 5)에는 임금이 사냥에만 열중하자 강무(講武)보다는 경연과 시사에 힘쓸 것을 거듭 청하기도 하였다.
1477년(성종 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토관(檢討官)‧시독관(侍讀官)‧지평‧검상(檢詳)‧집의, 내섬시정[內贍寺正], 대사성‧부제학‧대사간‧병조참지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481년(성종 12)에 상평창(常平倉) 설치 논의 시에 창름(倉廩)과 부고(府庫)가 있는 것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 하여 그 방책을 말하였고, 또 성종이 응방(鷹坊)을 혁파하고서도 다시 해동청 등을 진상케 하라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1487년(성종 18)에는 도성의 정업원(淨業院) 폐지와 이사(里社)의 폐단, 승려의 여염(閭閻: 일반 백성들이 사는 곳) 출입 금지 등에 대하여 청하였다.
1493년에는 『경국대전(經國大典)』 외에 조례(條例)와 교령(敎令)이 번잡하여 다시 속록(續錄)을 편찬하고 수교(讐校: 다른 것과 대조하여 교정함.)하니, 이러한 번잡을 피할 것과, 임금의 도리는 대강(大綱)을 총괄할 뿐 너무 소소한 데 힘써 손상됨이 없어야 한다고 직언하였다.
나아가 1499년(연산군 5)에는 임금이 사냥에만 열중하자 강무(講武)보다는 경연과 시사에 힘쓸 것을 거듭 청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집필자]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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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