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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위민(金爲民)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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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죽헌(竹軒)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전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고조부김충한(金沖漢)
하동정씨(河東鄭氏)
출신지전라북도 남원군(南原郡) 송동면(松洞面)
공신호원종공신

[상세내용]

김위민(金爲民)
생졸년 미상. 조선 전기 문신. 호는 죽헌(竹軒)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전라북도 남원군(南原郡) 송동면(松洞面) 출신이다.

김충한(金沖漢)의 후손이다.

1399년(정종 1)에는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01년(태종 1) 신사(辛巳) 증광시(增廣試) 동진사(同進士) 17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수녕부승(壽寧府丞)정언(正言)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등의 내직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금산수령(錦山首領)순천부사(順天府使)공주목사(公州牧使) 등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1403년(태종 3)에는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동(銅)으로 만드는 일에 수녕부승의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1406년(태종 6)에는 신량(身良) 수군(水軍) 석이(石伊)의 죄를 본원에 알리지 않고 옥에 가둔 일과 어버이가 병이 나자 광주(光州)로 내려가서 여러 날을 머물면서 역마(役馬)를 간청한 일 등으로 인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우정언(右正言) 직에서 파직되었다. 1408년(태종 8)에는 남성군(南城君) 홍서(洪恕)수원부(水原府)에 안치(安置)시키기 위해 내려가면서, 사사로이 소목(蘇木)을 가지고 가서 매매(賣買)를 하려다 행대감찰(行臺監察) 이유희(李有喜)에게 규찰(糾察)당한 일로 파직되었다.

1426년(세종 8)에는 제주(濟州)로 파견되어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고 제주목사(濟州牧使) 조희정(趙希鼎), 전 정의현감(旌義縣監) 양맹지(梁孟智), 대정현감(大靜縣監) 이신(李伸) 등을 국문하는 계를 올리면서 백성을 괴롭히는 폐단 10개조를 언급하였다.

1428년(세종 10)에는 전라도금산수령(錦山首領)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임지에서 동헌(東軒)을 새로 중수하고, 북쪽에 영벽루(映碧樓)라는 누각을 짓고, 시회(詩會)를 여는 등의 활동을 하여 문학(文學)으로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1445년(세종 27)에는 김위민의 파면이 있었는데, 성균관 생원들이 파면 반대 상소를 올릴 정도로 인망이 있었다. 1455년(세조 1)에는 원종공신 3등에 녹훈(錄勳)되었다.

[참고문헌]

경주김씨유사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國朝文科榜目
東文選
新增東國輿地勝覽
陽村集
朝鮮王朝實錄
브리태니커 세계사연표(http://timeline.britannica.co.kr/)
경주김씨 수은공파(http://www.sueun.org/)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