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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화(張允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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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1422(세종 4)
시대조선전기
본관흥덕(興德)
활동분야문신 > 문신

[상세내용]

장윤화(張允和)
미상∼1422년(세종 4).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흥덕(興德).

1388년(우왕 14) 별장으로 있으면서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지공거를 맡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1398년(태조 7)에 감승(監丞)으로 있으면서 순군(巡軍)에 갇혔다가 풀려나왔으나 소유하고 있던 전민(田民)을 속공(屬公)당하였다.

태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등용되어 1413년(태종 13)에는 강원도영길도(永吉道)경차관(敬差官)에 임명되어 민간에 쌓인 폐단을 교정하는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이어 1418년 사헌부집의로 있으면서 잘못이 없는 안성군수 권상온(權尙溫)을 탄핵하고 취조한 것으로 인하여 도리어 파직당하고 의금부에 하옥되어 곤장 60대를 맞고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직첩이 환급되었으며, 세종이 즉위하고 태종이 상왕으로 있을 때 의금부진무로 있으면서 일을 민첩하게 잘 처리하여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또한, 친척인 당시의 권세가 박은(朴訔)의 여러 차례에 걸친 천거에 힘입어 판전사(判典祀)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로 옮겼으며, 상왕 태종이 관장하고 있던 병조지병조사(知兵曹事)를 겸하여 세력을 떨쳤다.

곧 이어 병조참의로 승진하였으며, 이때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것을 기화로 상왕의 교지를 누설시킨 일이 있었는데, 당연히 사형을 당할 것이나 상왕의 배려로 무사할 수 있었다.

1419년(세종 1) 이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권세를 믿고 공공연히 뇌물을 받을 뿐만 아니라 공무를 빙자하여 사복을 채웠으나 권세가 무서워 아무도 감히 탄핵하지 못하였다.

1421년 전라도수군처치사 박초(朴礎)영암군수 박희중(朴熙中)에 의하여 50여조목에 이르는 자신의 비리가 폭로되자 박은 등 권세가에게 뇌물을 바치며 구명운동을 하는 한편, 증거를 인멸하기 위하여 감영의 창고를 불태워버리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파직당하고 1422년 부여에 귀양가 있던 중 죽었다.

태종의 근신으로 총애를 받았으나 비루하고 탐학하였으며 자신보다 뛰어난 자를 미워하는 등 시기심이 강하였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우인수(禹仁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