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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석(李澄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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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諡號)장강(莊剛)
생년?(미상)
졸년1461(세조 7)
시대조선전기
본관양산(梁山)
활동분야무신 > 무장
이전생(李全生)
공신호좌익공신(佐翼功臣)

[상세내용]

이징석(李澄石)
미상∼1461년(세조 7). 조선 초기의 무장. 본관은 양산(梁山).

지중추원사 이전생(李全生)의 아들이며, 이징옥(李澄玉)의 형이다.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1416년(태종 16)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으로 무과중시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1421년(세종 3) 상호군을 거쳐 연일진병마절제사(延日鎭兵馬節制使)가 되었고, 1423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우도병마도절제사를 역임하였다.

1427년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경상도병마도절제사가 되고, 다시 좌군총제가 되었다.

1432년 중추원부사를 제수받고, 이듬해에는 도원수 최윤덕(崔閏德)의 부장인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3,010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올자(兀刺) 등지로 향하여 파저강(婆猪江)에 침입한 야인을 평정한 공으로 중추원사에 올랐다.

그뒤 경상도병마도절제사경상좌도처치사경상우도도안무처치사 등을 역임하고 지중추원사에 이르렀으며, 이듬해에는 어버이를 섬기기 위하여 사퇴하였다.

그동안 무예가 뛰어나 변진(邊鎭)에 나가 무공을 세웠으나, 동생 이징옥이 청렴결백하여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청렴결백은 복없는 사람의 별호”라고 말하면서, 지방에 나갈 때마다 많은 토지와 노비를 점탈하여 탐관오리로 지탄을 받았다. 평소에 너무 탐욕하여 동생 이징옥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아버지의 상중에 이징옥을 구타하여 비난을 받을 정도로 성질이 난폭하였다.

1451년 문종이 즉위하자 다시 중추원부사에 임명되고, 이듬해 지중추원사에 승진하여 진하사(進賀使)명나라에 다녀왔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자, 당시 함길도도절제사로 있던 동생 이징옥은 크게 분개하여 병마를 이끌고 북으로 종성에 가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자칭하고 두만강을 건너려 하다가 종성판관 정종(鄭種) 등의 반간계(反間計)에 걸려 피살되었다.

이에 그는 아들과 함께 연좌 하옥되었으나, “평소에 동생과 사이가 나쁘고 내통이 없다.”하여 석방되었는데, 이는 수양대군이 그의 무예를 아껴 포섭하기 위해서였다.

1455년(세조 1) 세조의 왕위찬탈을 도운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고, 양산군(梁山君)에 봉하여졌으며,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강(莊剛)이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新增東國輿地勝覽
燃藜室記述
梁山邑誌

[이미지]

[집필자]

김성준(金成俊)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