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사검(李思儉)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C0ACAC80D1446X0
시호(諡號)공소(恭昭)
생년?(미상)
졸년1446(세종 28)
시대조선전기
본관양성(陽城)
활동분야무신 > 무신
이옥(李沃)

[상세내용]

이사검(李思儉)
미상∼1446년(세종 28).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양성(陽城).

개성유후 이옥(李沃)의 아들이다.

1405년(태종 5)무과에 급제하여 사직을 지내고, 1408년 양녕대군(讓寧大君)명나라에 조하(朝賀)할 때 수행하여 그의 난잡한 행동을 충고하여 미움을 받았다.

1418년 태종의 셋째아들인 충녕대군(忠寧大君: 뒤의 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태종의 명으로 그를 보좌하였다. 이어 상호군에 승진하였다가 파직되어 평산에 내려갔다.

1419년(세종 1)왜구가 비인현에 쳐들어와 병선을 불사르는 등 만행을 저지르자 황해도첨절사에 임명되었다. 같은해 조전절제사황해도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중 왜구가 식량을 요구하면서 교묘하게 싸움을 하지 않는 술책을 써오자 이들을 강력하게 물리치지 않은 죄로 변방에 충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426년 상호군으로 명나라에 바칠 해청(海靑: 매)을 잡으라는 명을 받았다.

이듬해 상호군으로 진응사(進鷹使)가 되어 매를 가지고 명나라로 가다가 요동에 이르러 매가 죽자 죽은 매를 가지고 북경의 대궐에 가서 중국 황제에 대한 조선왕의 예를 그르쳤음을 사죄하니, 명나라 황제가 가상히 여겨 장군모(將軍帽)를 하사하였다.

1429년 좌군첨총제(左軍僉摠制)경상좌도처치사를 지내고 공조참판이 되었다.

1432년 판의금부사가 되고, 1434년 중추원부사,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38년 성절(聖節)을 하례하고 돌아오라는 명을 받았으며, 같은해 왜구에 대한 방비책을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왜관을 옮길 것, 진관 설치를 조정할 것, 병선을 증강할 것, 병기의 검열을 철저히 할 것 등이었다. 시호는 공소(恭昭)이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燃藜室記述

[집필자]

강영철(姜英哲)
대표명이사검(李思儉)
사검(思儉)
성명이사검(李思儉)

성명 : "이사검(李思儉)"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02撰碑文以立以旱出宮人年壯者歸其家五月對馬島倭寇庇仁縣而謂曰非爲朝鮮來欲向中原絶糧至此若給之當退節制使李思儉等乃遺米四十五斛酒十甁乃解去兩上召群臣議乘虛殄滅對馬島之策命長川君李從茂率諸將往討之船摠二百二十七艘
紀年便攷v7都豆音串萬戶金成吉醉不能拒自泅其子力戰溺死黃海監司報節制使李思儉䓁候賊于海州為賊所圍賊曰我非為朝鮮来欲向中國絶粮至此思儉乃遺米四十斛始觧去
紀年便攷v7齎法醖徃慰之上王及上迎慰従茂䓁於樂天亭親宴将士上王命大護軍趙菑莅鞫前萬戶金成吉以戦敗之罪斬之前節制使李思儉以緛師之罪收職牒充黃海道水軍
記聞v1世宗元年己亥倭寇海州節度使李思儉爲其所圍犒以米酒解去上王曰若不掃除每被侵擾河異漢之見辱凶奴乎卽命以長川君李從茂爲都體察使將中軍以
大東彙纂v23世宗己亥倭寇庇仁又衛節制使李思儉於海州延平串思儉遺米酒得免上以領議政柳廷顯爲三道都統使參贊崔潤德爲三軍節制使長川君李從茂爲三軍都體察
國朝捷錄v01性古之甘者今亦甘古之苦者今亦苦草之爲物至微而其性猶如此今性豈異於古今乎盧㻶都事盧友明參奉柳孟連金錫弘李思儉縣監奉天祥參奉金大嚴察訪李誠成守琛靜庵畏友叔玉削科張玉許伯琦汝珍湖堂浩齋禮參田鈞提學鄭哲賢訓導陳宇進
韓史綮v1天錫固請還山許之天錫嘗述高麗末年事極辨辛氏之誣論者推爲信筆五月日本將攻明至黃海道庇仁縣索糧節制使李思儉以來四十斛應之王聞之欲乘其虛取對馬島使三軍都體察使李從茂等領慶尙全羅忠淸三道兵一萬七千餘人以往從茂
國朝人物志v1永川人太宗朝參翊戴功封長川君世宗己亥五月倭寇庇仁又圍節制使李思儉于海州延平串上召柳廷顯朴訔趙末生李明德許稠等議乘虛殄對馬島以邀賊還皆曰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