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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남(李季男)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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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걸(子傑)
시호(諡號)익평(翼平)
생년?(미상)
졸년1512(중종 7)
시대조선전기
본관평창(平昌)
활동분야문신 > 문신
공신호보사반정공신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계남(李季男)
미상∼1512년(중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자걸(子傑).

음직으로 1468년(예종 즉위) 감찰에 임명되었다.

1479년(성종 10) 지평을 거쳐 1486년 사헌부집의로 근무하다가 그해에 우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였다.

1489년 좌승지로 있다가 같은해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1491년 충청도관찰사로 천거되었을 때 장령 이거(李琚) 등이 그가 아무런 공로도 없고 특별한 재능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관찰사 임명에 반대하였으나 그대로 임명되었다.

1493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가 같은해 한성부우윤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그의 어머니가 와병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사임을 요청하였으나, 성종은 충효를 모두 오로지 할 수 없으니, 그대로 직책을 수행하라고 명하였다.

1496년(연산군 2) 호조참판이 되었고 2개월 후에 대사헌이 되었다. 그가 의금부 당상으로 있을 때에 연산군이 무죄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도록 요구하였으나, 명령을 어기고 무죄로 방면하였기 때문에 연산군의 진노를 사서 곤장을 맞기도 하였다.

이듬해 형조참판, 1504년에 호조판서가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이 있던 날 새벽에 박원종(朴元宗) 등이 군대를 이끌고 대궐을 향하여 진군할 때에 그도 유자광(柳子光) 등과 합류하여 반정에 협력하였으므로, 보사반정공신 2등에 녹훈되고 평원군(平原君)에 봉하여졌다. 그는 물욕이 많고 인색하여 집안의 일상생활에 쓰는 물건이나 비용에 대하여 직접 관여하였으며, 공신전(功臣田)을 지급받을 때에도 호조판서로 있음을 기화로 근거리의 비옥한 토지를 차지하여 주위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그러나 국가의 재정에 대해서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당시 중국과의 사신내왕이 잦고, 또 국가에 대상이 있어 그전의 배에 가까운 재정지출이 요구되었으나, 그는 예산을 적절히 사용하여 국가재정을 건실하게 운용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호조판서로서의 그의 능력과 아우인 이계동(李季仝)이 문무를 겸하여 고위관직을 나란히 차지하고 있음을 부러워하였다.

1511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燃藜室記述

[집필자]

송정현(宋正炫)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