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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융(朴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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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유인(惟仁)
호(號)우당(憂堂)
생년?(미상)
졸년1428(세종 10)
시대조선전기
본관밀양(密陽)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익(朴翊)
저서『우당집』

[상세내용]

박융(朴融)
미상∼1428년(세종 10)(주1)
졸년
『강고집(江皋集)』 卷14, 碑銘, [천관정랑 박공유적비명(天官正郞朴公遺蹟碑銘)]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운강집(雲岡集)』 卷6, 實錄, [선조 우당선생실록(先祖憂堂先生【朴融】實錄)]에는 "갑진(甲辰)"(1424) 졸로 나오는데,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1425) 8월 1일」 기사에 출현하는 것으로 보아, 1424년 졸은 오기로 추정됨.
.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유명(惟明: 國朝榜目에는 惟仁), 호는 우당(憂堂). 박익(朴翊)의 아들이다.

1408년(태종 8) 생원시를 거쳐 같은해에 병과로 급제했다. 문한(文翰) 계통의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 1411년에는 정언(正言)이 되었다.

같은해 12월 6일에 있었던 취각(吹角) 때에 간관들이 어떤 이유에 의해 모두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간관 전원이 면직처분을 받게 되었는데, 그도 사간 정준(鄭悛), 헌납(獻納) 정지아(鄭之雅) 등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뒤 재서용(再敍用)되어 전한(典翰)이 되었지만, 1418년에는 윤림(尹臨) 등 25인과 함께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고, 직첩이 환수되었다가 곧 재서용되었다.

1423년(세종 5) 1월 강원황해평안도에 지난해의 기근으로 인해 기민이 크게 발생하자, 해당지역 수령들의 진제(賑濟) 상황파악을 위해 경차관을 파견하였는데, 그도 이조좌랑으로 강원도에 파견되었다.

그뒤 경외(京外) 여러 관직을 거쳐 군수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우당집』이 있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國朝榜目
朝鮮圖書解題

[집필자]

장동익(張東翼)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