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융(朴融)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BC15C735FFFFD1428X0 |
자(字) | 유인(惟仁) |
호(號) | 우당(憂堂) |
생년 | ?(미상) |
졸년 | 1428(세종 10)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밀양(密陽)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박익(朴翊) |
저서 | 『우당집』 |
[상세내용]
박융(朴融)
미상∼1428년(세종 10)(주1)
.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유명(惟明: 國朝榜目에는 惟仁), 호는 우당(憂堂). 박익(朴翊)의 아들이다.
1408년(태종 8) 생원시를 거쳐 같은해에 병과로 급제했다. 문한(文翰) 계통의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 1411년에는 정언(正言)이 되었다.
같은해 12월 6일에 있었던 취각(吹角) 때에 간관들이 어떤 이유에 의해 모두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간관 전원이 면직처분을 받게 되었는데, 그도 사간 정준(鄭悛), 헌납(獻納) 정지아(鄭之雅) 등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뒤 재서용(再敍用)되어 전한(典翰)이 되었지만, 1418년에는 윤림(尹臨) 등 25인과 함께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고, 직첩이 환수되었다가 곧 재서용되었다.
1423년(세종 5) 1월 강원‧황해‧평안도에 지난해의 기근으로 인해 기민이 크게 발생하자, 해당지역 수령들의 진제(賑濟) 상황파악을 위해 경차관을 파견하였는데, 그도 이조좌랑으로 강원도에 파견되었다.
그뒤 경외(京外) 여러 관직을 거쳐 군수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우당집』이 있다.
졸년 |
『강고집(江皋集)』 卷14, 碑銘, [천관정랑 박공유적비명(天官正郞朴公遺蹟碑銘)]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운강집(雲岡集)』 卷6, 實錄, [선조 우당선생실록(先祖憂堂先生【朴融】實錄)]에는 "갑진(甲辰)"(1424) 졸로 나오는데,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1425) 8월 1일」 기사에 출현하는 것으로 보아, 1424년 졸은 오기로 추정됨. |
1408년(태종 8) 생원시를 거쳐 같은해에 병과로 급제했다. 문한(文翰) 계통의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 1411년에는 정언(正言)이 되었다.
같은해 12월 6일에 있었던 취각(吹角) 때에 간관들이 어떤 이유에 의해 모두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간관 전원이 면직처분을 받게 되었는데, 그도 사간 정준(鄭悛), 헌납(獻納) 정지아(鄭之雅) 등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뒤 재서용(再敍用)되어 전한(典翰)이 되었지만, 1418년에는 윤림(尹臨) 등 25인과 함께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고, 직첩이 환수되었다가 곧 재서용되었다.
1423년(세종 5) 1월 강원‧황해‧평안도에 지난해의 기근으로 인해 기민이 크게 발생하자, 해당지역 수령들의 진제(賑濟) 상황파악을 위해 경차관을 파견하였는데, 그도 이조좌랑으로 강원도에 파견되었다.
그뒤 경외(京外) 여러 관직을 거쳐 군수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우당집』이 있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國朝榜目
朝鮮圖書解題
世宗實錄
國朝榜目
朝鮮圖書解題
[집필자]
장동익(張東翼)
성명 : "박융(朴融)"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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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