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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룡(田見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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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덕보(德普)
생년1542(중종 37)
졸년?(미상)
시대조선전기
본관우봉(牛峰)
활동분야무신 > 무신
전상(田祥)
출생지개성

[상세내용]

전현룡(田見龍)
1542년(중종 37)∼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덕보(德普). 개성 출생. 처사 전상(田祥)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강하고 의협심이 있어 불의를 용납하지 아니하였다. 당시 송도에는 음사(淫祀)가 성행하여 민간에게 피해를 주었는데 처사 김이도(金履道)와 상의하여 송악산의 음사를 불태워서 주민의 의혹을 없앴다.

1564년(명종 19) 생원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여 문명을 떨쳤고,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아니하고 향리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이 연안을 지키면서 격문을 보내 의병을 초모할 때 달려가서 이정암의 막하로 들어갔다. 그 때는 구로다(黑田長政)가 거느리는 왜군이 연안을 포위하고 맹렬한 공격을 퍼붓고 있을 때였다. 연안성을 지킨 지 4일째 되던 날 동남풍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조신옥(趙信玉)과 함께 몰래 성문을 빠져나와 왜진에 섶을 가져다가 불을 질렀다. 맹렬한 바람에 화세가 충천하여 적이 혼란에 빠지자 성병이 출격하여 왜병을 대파하였다. 구로다는 이에 겁을 먹고 포위를 풀어서 후퇴하였다.

그때는 이미 황해도 전역이 적의 수중에 떨어진 뒤였으나 오직 연안성만은 무사히 보전할 수 있었다. 그 공을 인정받아 해주목사에 올랐다. 난 후 난민을 초모하여 이들을 보살피고 이들이 생활하도록 선정을 베풀었다.

[참고문헌]

國朝榜目
松陽耆舊傳

[집필자]

권오호(權五虎)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