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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훈(白光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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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창경(彰卿)
호(號)옥봉(玉峰)
생년1537(중종 32)
졸년1582(선조 15)
시대조선전기
본관해미(海美)
활동분야문학 > 시‧시조인
백세인(白世仁)
저서『옥봉집』

[상세내용]

백광훈(白光勳)
1537년(중종 32)∼1582년(선조 15).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해미(海美).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峰). 백세인(白世仁)의 아들이며, 백광홍(白光弘)의 아우이다.

박순(朴淳)의 문인으로 13세에 상경하여 양응정(梁應鼎)노수신(盧守愼) 등에게서 수학하였다.

1564년(명종 19) 진사가 되었으나 현실에 나설 뜻을 버리고 호해(湖海)에서 시와 서도(書道)로 자오(自娛)하였다.

1572년(선조 5)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백의(白衣)로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시재(詩才)와 서필(書筆)로써 사신을 감탄하게 하여 백광선생(白光先生)의 칭호를 얻었다.

1577년 처음으로 선릉참봉(宣陵參奉)으로 관직에 나서고, 이어 정릉(靖陵)예빈시(禮賓寺)소격서(昭格署)참봉을 지냈다.

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리었는데, 송시(宋詩)의 풍조를 버리고 당시(唐詩)를 따르며 시풍을 혁신하였다고 해서 그렇게 일컬었다.

송시냐 당시냐 하는 시비는 아주 심각하게 전개되었는데, 삼당시인들은 송시가 자연스런 감동에서 멀어지고 인정이나 세태의 절실한 경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을 지적하고, 방향전환을 위해서 당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의 시는 당풍(唐風)을 쓰려고 노력하였고, 풍류성색(風流聲色)을 중시하여 자못 낭만적이고 염일(艶逸)한 시풍(詩風)을 보였던 것이다. 이정귀(李廷龜)는 그의 문집 서(序)에서 손꼽히는 호남시인으로 특히 절구(絶句)를 잘하여 당나라의 천재시인 이하(李賀)에 비견된다고 하였으며, 또한 그의 시는 천기(天機)로 이루어진 것이라 평하였다.

그는 이산해(李山海)최립(崔笠) 등과 더불어 팔문장(八文章)의 칭호를 들었다.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서 영화체(永和體)에 빼어났다.

죽은 뒤 1590년 강진(康津)서봉서원(瑞峰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옥봉집』이 있다.

[참고문헌]

玉峰集
楓崖集
丈巖集
朝鮮圖書解題

[집필자]

고경식(高敬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