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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응남(朴應男)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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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유중(柔仲)
호(號)퇴암(退庵)
시호(諡號)문정(文貞)
생년1527(중종 22)
졸년1572(선조 5)
시대조선전기
본관반남(潘南)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소(朴紹)

[상세내용]

박응남(朴應男)
1527년(중종 22)∼1572년(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유중(柔仲), 호는 남일(南逸) 또는 퇴암(退庵). 사간 박소(朴紹)의 아들이다.

8살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와서 유조인(柳祖訒)에게 배웠고, 뒤에 성제원(成悌元)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수찬과 육조의 참의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 국정을 전단하던 이량(李樑)의 죄를 탄핵하다가 귀양갔으나 왕이 특별히 용서하여 풀려났다.

명종이 임종할 때 좌승지로 금중(禁中)에서 숙직하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 함께 고명을 받아 선조가 왕위를 계승하는 데 공을 세웠다. 심의겸(沈義謙)과 친교가 두터워 조카딸(應順의 딸)을 선조비로 책봉하도록 하였으며, 궁중의 복색을 화사하고 선명한 것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이이(李珥)『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고지식하며 말을 과감히 하고 겉으로는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는듯하나 속으로는 시비를 판단하는 기준이 있었다.”고 평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였기 때문에 대사헌 재임중 기탄 없는 논박을 하여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 왕비의 숙부였으므로 왕의 총애를 받으니 사림(士林)의 큰 힘이 되었고, 그가 죽자 사류(士類)들이 애석하게 여겼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홍종필(洪鍾佖)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