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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曺植)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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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건중(健仲)
호(號)남명(南冥)
시호(諡號)문정(文貞)
생년1501(연산군 7)
졸년1572(선조 5)
시대조선전기
본관창녕(昌寧)
활동분야학자 > 유생
조언형(曺彦亨)
이씨(李氏)
증조부조안습(曺安習)
출신지경상도 삼가현
저서『남명집(南冥集)』
저서『남명학기유편(南冥學記類編)』
저서『파한잡기(破閑雜記)』

[상세내용]

조식(曺植)
1501년(연산군 7)∼1572년(선조 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仲),(주1)
『기년편고(紀年便攷)』에는 자가 건중(楗仲)으로 되어 있다.
호는 남명(南冥). 생원 안습(安習)의 증손으로, 승문원판교 조언형(曺彦亨)의 아들이며, 모친은 이씨(李氏)이다.
1. 유년시절
1501년(연산군 7)경상도 삼가현 토골〔兎洞〕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학문연구에 열중하였으나 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중국의 대유학자인 주자(朱子)정자(程子) 등의 초상화를 손수 그려 병풍으로 만들어 수시로 펴놓고 자신을 독려하였다. 1527년(중종 22)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다.

1531년 생계가 어려워 어머니를 모시고 살림이 넉넉한 처가를 찾아가 김해의 탄동(炭洞)에다 산해정(山海亭)을 지어 제자교육에 힘썼다.
2. 학문연마와 강학활동
1539년 38세에 유일(遺逸)로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44년 관찰사가 만나기를 청하여도 거절하였다. 1549년(명종 4)에는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에 특진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집 근처에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를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다.

그뒤 1552년 종부시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554년 벼슬길에 나아가라는 이황(李滉)의 권고도 거절하였다. 그뒤 1556년 단성현감, 1560년 조지서사지 등으로 부름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이와같이, 벼슬을 거절하고 은일로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나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만 갔다. 이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1551년 오건(吳健), 1556년 하항(河沆), 1563년 김우옹(金宇顒), 1565년 최영경(崔永慶), 그 이듬해 정구(鄭逑) 등이 찾아와 사사하였다. 1561년 지리산덕천동(德川洞)으로 이거하여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강학에 더욱 힘썼다.

1567년 5월 왕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같은해 8월에 상서원판관에 임명하여 두번씩이나 부르자 입조하였으나 왕을 만나 치란(治亂)에 관한 의견과 학문의 도리를 표하고 낙향하였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힘썼다.
3. 학문적 견해
그는 학문을 알기만 하면 족한 것이 아니라 반궁체험(反躬體驗)과 지경실행(持敬實行)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는 특히 경의(敬義)를 높였는데, 마음이 밝은 것을 ‘경(敬)’이라 하고 외적으로 과단성이 있는 것을 ‘의(義)’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바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부생활을 처리하여나간다는 의리철학 또는 생활철학을 표방한 것이다. 그는 특히 실천궁행을 가장 강조하였는데, 그의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不義)와는 일체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독서할 때마다 몸에 긴요한 것이 있으면 이를 기술, 편찬하였다. 이것이 『학기유편(學記類編)』인데, 그는 이 『학기유편』을 통하여 도(道)의 체통(體統)을 말하고 학문하는 방법과 논심(論心)의 요경 및 수신(修身)의 방법과 치국의 도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삼재태극도(三才太極圖)‧성위태극도(誠爲太極圖)‧천인일리도(天人一理圖) 등 10여종의 도해(圖解)를 붙여 어려운 이학(理學)을 설명하였다.

그는 또 초심자(初心者)에게 『심경(心經)』『서명(西銘)』『태극도설(太極圖說)』 등 심성(心性)에 관한 문장을 가르치는 이황의 교육방법을 반대하고, 『소학』『대학』『논어』와 같은 실천적인 경전을 먼저 가르쳐야 하고 교수방법도 스스로 터득하는 길을 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 이황과의 관계
한편, 그는 경상좌도의 거유(巨儒) 이황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대유학자로 쌍벽을 이루었다. 두 거유는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으나 서신으로 서로 안부를 물어 우의를 돈독히 하였지만, 학문적으로는 약간의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상도의 학자들은 두 사람을 모두 존경하여 두 문하를 번갈아 출입하는 자가 많았다. 특히, 정구김우옹정탁(鄭琢) 등이 그 대표적인 학자라 하겠다.

그러나 그의 수제자격인 정인홍(鄭仁弘)만은 이황에게 출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두 거유의 견해차이를 들어 상당한 마찰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물론, 자기의 스승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뒤에 이언적(李彦迪)과 함께 이황이 문묘에 배향되자 이황과 이언적의 출향(黜享)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두 계열의 문하생들이 친밀한 관계로 지내다가 때로는 소원해진 사이가 되기는 하였으나, 후기에 오면 경상도의 두 학자를 서로 추장(推奬)하는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5. 문인풍과 학풍
조식의 대표적인 문인들을 살펴보면 정구‧곽재우(郭再祐)정인홍김우옹이제신(李濟臣)김효원(金孝元)오건강익(姜翼)문익성(文益成)박제인(朴齊仁)조종도(趙宗道)곽일(郭𧺝)하항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한국유학사에서 크게 세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이들은 대부분 은둔적인 학풍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가 벼슬길에 나오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행적이 그대로 제자들에게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경상좌도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경상우도의 학풍을 대표하였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진주 등지에 거주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문풍(文風)을 일으킨 지역문화의 기수들이라 하겠다.

셋째, 국가의 위기 앞에 문인으로 몸소 앞장서 싸움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의 의병활동에 참여,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즉, 그들은 국가의 위란 앞에 학자의 몸으로 수수방관하지 않고 직접 몸을 던진 참여정신이 투철한 자들이었다. 이러한 정신과 모습은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6. 사후의 상황
선조대사간에 추증되고, 1615년(광해군 7) 영의정이 더하여졌다. 진주덕천서원(德川書院), 김해신산서원(新山書院), 삼가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남명집』『남명학기유편(南冥學記類編)』『파한잡기(破閑雜記)』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 「남명가」‧「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志
燃藜室記述
淸選考
南冥集
寒岡集
南冥 曺植과 南冥學派(李樹健, 民族文化論叢 2‧3合輯, 1982)
南冥의 反躬體驗과 持敬居義思想의 硏究(崔丞灝, 韓國의 哲學 11, 1983)

[집필자]

송찬식(宋贊植)

성명 : "조식(曺植)"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國朝編年v07于雲門山中三足堂年七十三公嘗言年過六十壽已足矣朝夕之供不撤酒食不可謂不足遂以三足名堂而自號其友人南溟曺植誌之曰老夫保人蓋寡獨許以天下士者公也甲視之則容容大雅討論經史之弘儒也乙視之則仡仡長身射御不違之豪士也
國朝編年v08賜宴于宮庭○六月三十日酉時東方黃雲彌天其光照地○設科取黃瑞等三十六人○下書八道令擧遺逸得成守琛李希顔曺植成悌元趙昱等以操行卓異皆敍六品職○倭人與中國啇賈等漂到旌義縣殺掠人民爲官軍所擊走餘黨三十餘名登漢挐山藏
國朝編年v09氣太過或認理爲氣然吾東方前此未有論著至此者發明理氣始有此人耳但言語之際自負太過恐其所得未深也又曰南冥曺植所見實與莊周一串林葛川薰言於退溪曰南冥令弟子撤毁淫婦家甚不當莫如獨採我薇蕨也退溪曰此言甚當又曰鄭靜而
國朝編年v09勸課敎誨厚倫成俗端在於此且爲學之方莫先於小學入學時必令講試小學則幼學之士自知向方以此申飭學行○召處士曺植成運前郡守李恒等皆不至○成運字健叔號大谷生於弘治丁巳辛卯中生進時承己卯斬伐之後儒服弊地先生作詩悼之遂
國朝編年v13五穀之盛無異平日道內餘城至今保存上嘉之特賜溫諭郭再祐字季緩監司越之子器宇䆖遠豪俠好義勇奪三軍少從南冥曺植學植妻以外孫女遂棄擧業漁釣自娛年四十餘布衣窮居聞變首起義兵屢以捷聞始除幽谷察訪以表奬之移拜刑曹正郞以
國朝編年v17生歌謠此係彌文況餘哀未盡不必盡行光海不悅命只行獻軸停結綵等事月沙諡狀○左贊成鄭仁弘忿晦齋退溪之短其師曺植陳疏極毁兩賢殺王子娼妓之失館學儒生李楘等五百餘人疏辨之且陳仁弘誣賢之罪光海震怒特命禁錮疏頭於是崔有淵
國朝編年v18穆公字道可號寒崗淸州人公初學於吳德溪健又受學於李退溪又見曺南冥植許以君子戊寅拜昌寧縣監上召見問曰李滉曺植其學何如對曰滉德厚而學純學者可以尋入植超然自得特立獨行學者難以爲要也至是卒年七十八所著五先生禮說心經
紀年便攷v10命文武二品以上各薦一二人權習崔繼成徐敬德成守㻠趙晟禹成勳辛百齡金就成曺植琴軸鄭弘翼金大
紀年便攷v12馬薦科臺省州縣榮足矣朝夕酒肉之供亦不可謂不足矣因以爲號明宗辛亥卒年七十三金湜亡命扺大有家大有知而不納曺植曰天佑此事義則義矣無乃於情忍乎哉植撰墓誌曰盖世之雄今也則亡
紀年便攷v12已無救矣年三十九官止大司成方其逋也抵金大有家賊服拜於門外大有不納使蒼頭傳語曰子何爲若是苟且累及於人耶曺植曰天佑此舉義矣無乃於情忍乎哉仁宗乙巳給牒宣祖朝追錄光國從勳贈吏參後加贈二相謚文毅孫權樞見下長子德秀燕
紀年便攷v12徐敬德唐城人副尉好蕃子成宗己酉生字可久號復齋又花潭李延慶門人與李滉曺植從遊生於松京母韓氏夢入夫子廟而生敬德天資聦頴眉宇明快眼若曙星年近志學受尙書至朞三百塾師不肯授敬德退而
紀年便攷v12十一月徳興君第三子宣祖誕生○賜開城府學公田十結○命諸道薦遺逸士京畿薦成守琛趙昱清洪道薦成悌元慶尙道薦曺植李希顔遂超拜六品職守琛除禮山縣監不赴以親老移拜積城縣監又不赴希顔除高灵縣監植除丹城縣監乃抗䟽悌元除報
紀年便攷v12守龍壽光城令舜禮各加一資尹希慶南弼文除職○命朱溪君深源添入三綱行實○命吏曺以遺逸成守琛䓁首先除職守琛曺植洪致堯李夢成尹希慶卞勲男許橿䓁也○命抄啓文章宰相命大臣禮官同議抄啓尹春年䓁十三人○世子順懐入學博士洪
紀年便攷v12擢用○九月葬康陵在楊州行状李滉撰○執義竒大升請李彦廸趙光租復官贈職従之命復彦廸官爵贈光祖議政○召䖏士曺植成運前郡守李恒皆不至紀年便攷第十九終
紀年便攷v13李浚慶潤慶弟燕山己未生金楊震婿字原吉號東皐又紅蓮又南堂又養窩與李滉成守琛曺植爲道義交少磊磈不羣儀貌䧺偉有名多士間中宗壬午生員辛卯登明經科歴南床翰林銓郞直學仁宗初言於人曰冝早建儲
紀年便攷v16鄭搆慶州人字肯甫號永慕菴曺植門人國哀方䘮三年以孝聞于朝特除縣監以榮其親
紀年便攷v16正郞世俊子中宗己丑生字孝元號守愚堂又三峰曹植門人壁立千仞秋霜然日胷次灑落方壺氷月望之若神仙氣象風節與曺植相伯仲志操介潔行義端方非其義也一毫不取親殁傾家為石槨葬家在城中不事交遊皆称固執之士安敏學見而異之言於
紀年便攷v16宋師頣字敬叔號新淵以薦拜叅奉棄帰性温醇樂易環堵蕭然䖏之晏如也早従金希参遊曺植称之曰烏金謂有實行隐徳也人不知也崔永慶簡亢見師頣必下階迎拜
紀年便攷v16金致遠完山人字士毅號濯溪李希顔門人又徃来曺植之門宣祖壬辰募郷兵討賊與倡義諸人遮截駱江官止察訪院享
紀年便攷v16李濟臣恕長玄孫武兵使文誠子中宗丙申生尙震孫婿字夢應號漬江曺植門人又事趙昱明宗戊午生貟甲子登明經科歴翰林持平正言蔚山晉州清州江界在江界時革弊行恵築城親自運石為士卒
紀年便攷v16河洛晉州人生進麟瑞子字道源號喚惺齋曺植門人宣祖戊辰生第二進壮俱中以學行薦為王子師傅癸未成渾李珥被誣洛抗䟽洞辨壬辰遇賊遂死年五十七贈左承㫖弟
紀年便攷v16李天慶字祥甫早廢科受學於曺植力踐精詣丁母憂而遭壬辰亂載木主祭器顛沛流離之除不廢朝夕祭奠
紀年便攷v16行拜六品職又拜臺職性隂鷙豪橫嶺右為李山海腹心急於搆罪柳永慶投進一䟽又詆毀李滉成渾以李彦廸李滉之短其師曺植上䟽誣毀彦廸及滉太學儒生李楘䓁陳䟽訟辨且削仁弘儒藉持平朴汝樑為其師訐啓之李恒福曰曺植之門無仁弘則道益
紀年便攷v16彦廸李滉之短其師曺植上䟽誣毀彦廸及滉太學儒生李楘䓁陳䟽訟辨且削仁弘儒藉持平朴汝樑為其師訐啓之李恒福曰曺植之門無仁弘則道益尊仁弘之劄得汝樑而罪益深仁弘素為郷隣士友所畏服壬辰以前掌令自陕川自称義兵将專事作亂嗾
紀年便攷v16鄭仁弘瑞山人綸子中宗丙申生梁喜婿字徳遠號徕菴曺植門人剛嚴篤於孝悌初有盛名宣祖癸酉薦卓行拜六品職又拜臺職性隂鷙豪橫嶺右為李山海腹心急於搆罪柳永慶投進一
紀年便攷v16趙宗道旅五世孫参奉堰子白仁傑外孫李俊民婿中宗丁酉生字伯由號大笑軒曺植門人汝立之獄與崔永慶係獄永慶凝定自守叱咜獄卒宗道謔泿諧笑無異平日卓犖而不覊真竒男子也恒言多笑故以為號
紀年便攷v16河沆洛弟字浩源號覺齋曺植門人植曰得人而教沆氣賁清明介拔俗望之知非塵世間人人称雪中梅薦授参奉不就與趙宗道為道義交以儒生䟽論李珥
紀年便攷v16金沔鐸孫武府使世文子秀文従姪中宗辛丑生字志海號松菴遊李滉曺植鄭逑之門舉孝廉授寢郞不就宣祖初陞工佐不赴壬辰與弟澮及趙宗道郭䞭文緯朴惺倡義於高靈居昌之間 上嘉之拜陕
紀年便攷v17鄭逑崑壽弟琢族侄金宏弼外曾孫中宗癸卯生字道可號寒岡又百梅園李滉門人又出入於吳健曺植之門與李瀷金沔遊生有異質見者稱以神童八歲受大學論語已通大義九歲執親丧無異成人手摸孔子畵像掛壁曰必再拜
紀年便攷v17李源陜川人字君浩號清香堂博學力行尊慕曺植李滉與鄭逑崔水慶契分甚厚好善惡惡出於天性鄕人爼豆之從子光友字和甫號竹閣早及曺植之門清貧自守於物慾泊如
紀年便攷v17浩號清香堂博學力行尊慕曺植李滉與鄭逑崔水慶契分甚厚好善惡惡出於天性鄕人爼豆之從子光友字和甫號竹閣早及曺植之門清貧自守於物慾泊如也權貴欲授官固辭之
紀年便攷v17趙瑗林川人以文都事應恭子為季父應寃後李後民婿字伯玉號雲江又倚楼師事曺植植以佳士稱之有詩名明宗甲子進壯子若孫連三世進壯李珥為生壯宣祖壬申登别試歴翰林三司銓郞官上承旨與李潑同
紀年便攷v17柳宗智字明仲號潮溪好學力行曺植許以醉厚再除參奉不就己丑汝立獄起儒生丁巖壽等䟽論其締結逆賊之罪被杖死其在晋陽獄也崔永慶勉以順受其正
紀年便攷v17李大期仟十二世孫軍資監正得蕡子李希顏外孫明宗辛亥生字任重號雪壑就學於崔永慶又出入曺植之門始除掌苑别提官止司導僉正宣祖壬辰之亂招集義兵截洛東與郭再祐諸人相與聲援北論方盛抗䟽極言謫白翎所著
紀年便攷v17姜壽男淮仲六世孫以璹子為叔父進士號海谷瑞后明宗壬子生字仁叟曺植門人篤孝友富詞藻宣祖庚辰登别試忤當䟯出為陽城官止正郞壬辰亂與姜鳯壽同爲沈岱從事狥于朔寧之戰年四十一贈
紀年便攷v17學知申有詩名初入西黨後附東人文緯丹城人遍政山斗子明宗甲寅生字純夫一順甫號第溪六七嵗受尙書有求道之志事曺植吳健鄭逑宣祖壬辰答郷兵與金沔合癸巳沔卒任後事治其喪以金宇顒柳成龍薦授教官陞主簿監察光海己酉棄官歸仁弘
東國歷代總目v02壬申是歲皇明穆宗皇帝崩神宗皇帝卽位前尙瑞院判官曺植卒○植字楗仲號南冥擧遺逸累授職徵入引對進治亂之道卽辭歸至是卒年七十二
東國歷代總目v02庚申是歲皇明神宗皇帝崩光宗皇帝卽位○光宗皇帝崩熹宗皇帝卽位前大司憲鄭逑卒○逑字道可號寒崗曺植門人也以薦授職累超遷至是卒年七十八
歷代帝王紀年v01南溟曺植字健中自號云云昌寧人嘗曰道不遇時終不必行吾所學卷懷山野築山海亭雷龍舍居之屢徵不起明廟引見問治亂之道答
國朝捷錄v01曺 植
靑邱風雲v1徐敬德字可久號花潭贈右相李□□浩號退溪眞寶人中廟□第宣廟庚午卒辛酉生長栗谷二十五年曺植字健中號南溟宣廟壬申卒與退溪同庚李獻號栗谷撰進聖學輯行又上萬言疏甲申卒年四十九丙戌生成字浩
靑邱風雲v1撰鄭汝立逆變作上使鄭澈爲委官治獄大臣鄭彥信及李潑李浩白惟讓曺大中等皆死其黨多坐竄東人崔永慶以曺植門人有淸修名官至臺憲汝立獄起有吉三峯謀主之說朝家方詗捕湖南伯洪汝淳密告謂吉三峯卽永慶自嶺外拿遞卒死
韓史綮v1期待徐花潭之自得李退溪之涵養爲東方三君子退溪滉之自號也辛未四年明穆宗隆慶五年王卽位以來屢召曺植皆不至于是又遣中貴人問之則植已卒矣贈官以奬之植少時豪爽好文章旣而反于經學踐履嚴篤嘗危坐一室以兩手
國朝人物志v1世稱三玉群豹一斑希顏字克翁號黃江器量宏深明宗朝以遺逸屢除官大東韻玉曺植李希顏俱以逸擧曺則屢徵不應李則前後三應命曺以詩譏之曰山海亭中夢幾回黃江老子雪盈顋半生
國朝人物志v2天士林網盡及明廟末淸議復發群奸勢衰明胤乃於經席啓曰乙巳餘黨多有冤枉請稍伸雪以慰人心及曺植李恒等之被召也明胤欲阿善類白明宗曰此輩當授以臺侍之任其壟斷之術老而益巧士林憤嫉之至
國朝人物志v2臣之義杖配義州賜死後伸乙巳錄兄震字仲允丁酉生員文科參議乙巳被謫上同南冥曺植夢見霖詩曰與子樹下別此懷誰似之丹心猶未死只有半邊皮朝野僉載
國朝人物志v2壁書之禍被謪謫昆陽戊申量移巨濟在謪謫十六年猶有惓惓愛國之誠嘗草疏極陳時弊南冥曺植往見力止之不果上著壯行通考負暄錄各十卷庚申卒于謪謫年四十九獄禍方嚴尹元衡欲其脫於
國朝人物志v2氣之被禍退居禮安林億齡駭見百齡之戕賢棲遲外服徐敬德之遯于花潭金麟厚之絶意名宦曺植李恒之幽棲海隅鄭之雲之逃名麴孼者莫非己卯乙巳之禍有以激之也成悌元親覩宋麟壽之慘禍
國朝人物志v2學究天人沈機先物蓋有實見得於公而若使栗谷早知公則必不以詆公矣尹孤山集兒時與南冥曺植同學山中其嬉戲嘗以安社稷自期謂南冥曰爾則枯死巖穴之人也及公登台鼎南冥以書抵曰願公上竦如
國朝人物志v2己丑以全州府尹退歸楊根靈川洞卒年六十七弟彥紀字張甫號考槃有學行從南冥曺植受業進士官至別坐彥縝字敬甫號雪厓官止司評彥縝子橃字公濟號華隱文科
國朝人物志v2字子強號德溪咸陽人少師南冥曺植聰明篤學壬子生員進士戊午文科歷典翰吏曹正郞務恢公道性淳實果敢遇事直前無所回撓人多怨者
國朝人物志v2余抽宋史英宗記出歐陽脩告慈聖太后深宮之一婦人臣等五六書生之語曰當以此相救解明日詣闕啓稟曺植專襲古人告君語上竟不問淸江瑣語
國朝人物志v2後丙寅命吏曹擇六條具備之士其目曰經明行修所薦六人李恒成運林薰金範韓脩南彥經範與曺植同時入見上問治道對以養心執德講學明理爲出治之本特除玉果縣監卒于官子弘敏弘微俱登第
國朝人物志v2字子誠號石溪平山人寓居密城隱居不仕力於爲學多有所見南冥曺植許以知己友季誠早從松堂朴英學有師友淵源之正卒後學者稱之曰松溪先生病亟之日小室在傍
國朝人物志v2字景立靈山人參議弼周子丙午文科牧使己丑卒年六十二南冥曺植作墓銘人物考
國朝人物志v2吾無所恃只恃草屋數間壬申爲北道兵使諸胡相戒曰張將軍來鎭愼毋犯邊生事在梁山往謁南冥曺植植奇之曰百世之下復見夷齊禦下卒以嚴或謂過當弼武曰夫好生惡死人之常情驅惡死之人以赴死地不敢
國朝人物志v2昭格署參奉九歲母夫人患痢公嘗糞行禱北辰人異之平居必鷄鳴盥櫛比晨謁家廟出就書座危坐誦讀從南冥曺植遊與玉溪盧禛東岡金宇顒講磨人物考
國朝人物志v2推類而通見陶山李滉講心經遂棄擧業專心經學金宇顒白上曰有鄭某者遊李滉鄭某曺植門明於經術可以布衣召問治道授參奉不就陞義興三嘉皆不就拜昌寧縣監上引見問李曺
國朝人物志v2字浩源號覺齋晉州人事南溟曺植丁卯司馬以薦再除參奉不就卜居大覺村因號曰覺齋晩年還舊居題其堂曰來復少多疾病耿介拔俗無一點
國朝人物志v2字明仲號潮溪晉州人少學擧業與覺齋河沆同學于南溟曺植始知爲學向方再除參奉不就己丑鄭汝立獄拿囚禁獄殞命於杖下東儒師友錄
國朝人物志v2字仁伯號省菴善山人縣監弘遇子甲子進士乙丑文科時年二十四選入天官湖堂從南溟曺植學東西論議紛紜有請兩出之者於是沈義謙爲開城留守孝元爲富寧府使李珥疏曰孝元
國朝人物志v2字仲思號靜默慶州人姿稟厚重幼少已有長者風遊南溟曺植門與崔守愚永慶河覺齋沆金松菴沔大笑軒趙宗道有麗澤之益鄭逑曰朴齊仁
國朝人物志v2字大霖號西溪翁南原人參判喜子從南溟曺植學識見精博踐履篤實盧玉溪禛歎美之曰梁喜有子也晩從成牛溪爲師友硏精曰正學俗學在天理人欲與
國朝人物志v2字和甫號竹閣陜川人淸香堂源從子早遊南溟曺植門對中庸章句極詳盡無遺植喜曰不圖汝之曉解如此安貧樂道不爲物欲所累時在要路者欲授官力辭不
國朝人物志v2字公實號浮査野老昌寧人早有文名己酉司馬受尙書于南溟曺植平生無疾言遽色處事務以醇愨年八十七卒東儒師友錄
國朝人物志v2字守夫宗室也性癖山水名勝之地足迹殆遍從曺植學世稱豪傑之土士植曰花色場中挺有如公者幾人耶所憂只在汗血之行而中道止也晩年與東岡
國朝人物志v2字伯玉號雲江林川人判書李俊民以女妻之文科歷仕淸顯官至承旨從曺植學植許以嘉士東儒師友錄有三子希哲希逸希進俱有文名著世
國朝人物志v2名公弼性軒昂不郡群不以外物動其心南冥曺植一見稱之曰此人天品淸高知識通明雖學詩禮者殆不能及年四十八終德川師友錄
國朝人物志v2字景直號柏谷驪陽人性剛直嫉惡如讎家貧固守不以爲意受業于曺植與守愚崔永慶諸公情分最厚德川師友錄
國朝人物志v2雲知公有遠器深加誘掖令讀小學判書鄭思中一見甚器以其弟承旨思誠女妻之戊午中司馬納拜曺植叩竭無餘後從寒岡游又與洛川裴紳梧溪金富倫東岡金宇顒相友善大菴朴惺存齋
國朝人物志v2字伯由號大笑軒咸安人漁溪旅五代孫南冥曺植門人七歲能屬文十歲學于隱君子鄭斗聰明過人戊午生員屢擧不第薦授察訪歷縣令有至性高行
國朝人物志v2字道源號醒齋晉州人戊辰進士薦爲王子師傅與弟覺齋沆同受業南冥曺植之門孝友篤學成渾李珥被詆誣洛抗章洞辨自是不樂仕退歸尙州壬辰死于倭人物考河
國朝人物志v2字仁叟晉州人進士瑞子參判淮仲五代孫庚辰文科早歲遊南冥曺植門登第以微事見忤雖抹殺沈淪未嘗以身詘刓其方壬辰兩京失守觀察沈岱擧以從事壽男起自書生
國朝人物志v2字德遠號萊菴瑞山人正字僖曾孫受業于南溟曺植以經明行修宣祖超授掌令壬辰倡義起兵朝廷以爲倡義將戊申上疏劾柳永慶被竄行到廣州
(新編) 尺牘大方v1天下之才一石、曺植、獨得八斗
(新編) 尺牘大方v1曺丕、欲害曺植、植吟煮豆燃豆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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