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申抃)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2E0BCC0FFFFB1470X0 |
자(字) | 낙옹(樂翁) |
호(號) | 귤우정(橘宇亭) |
시호(諡號) | 정신(貞信) |
생년 | 1470(성종 1) |
졸년 | 1521(중종 16)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평산(平山)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신영화(申永和) |
조부 | 신수복(申守福) |
[관련정보]
[상세내용]
신변(申抃)
1470년(성종 1)∼1521년(중종 1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낙천(樂天)‧낙옹(樂翁), 호는 귤우정(橘宇亭). 정랑 신수복(申守福)의 손자이며, 감찰 신영화(申永和)의 아들이다.
1501년(연산군 7)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15년(중종 1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곧 성균관학유가 되었는데, 왕이 유능한 인재를 탁용(擢用)하려 하자 병조판서 고형산(高荊山)이 변방판관의 적임자로 추천하였다.
1517년에 이조판서 남곤(南袞) 등이 그를 정자 유용(柳庸)과 함께 재능이 있다 하여 6품직에 승급시켰다.
1519년에 지평을 거쳐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지평(砥平)에 일시 은거하였다가 병조좌랑이 되었는데,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파직되어 다시 지평에 은거하였다.
1521년에 동생 생원 신철(申哲)이 송사련(宋祀連)의 무고에 의하여 일어난 신사무옥에 연루되었을 때 지란불고죄(知亂不告罪)와 교결역신죄(交結逆臣罪)의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였다. 후일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지평의 운계서원(雲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신(貞信)이다.
1501년(연산군 7)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15년(중종 1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곧 성균관학유가 되었는데, 왕이 유능한 인재를 탁용(擢用)하려 하자 병조판서 고형산(高荊山)이 변방판관의 적임자로 추천하였다.
1517년에 이조판서 남곤(南袞) 등이 그를 정자 유용(柳庸)과 함께 재능이 있다 하여 6품직에 승급시켰다.
1519년에 지평을 거쳐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지평(砥平)에 일시 은거하였다가 병조좌랑이 되었는데,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파직되어 다시 지평에 은거하였다.
1521년에 동생 생원 신철(申哲)이 송사련(宋祀連)의 무고에 의하여 일어난 신사무옥에 연루되었을 때 지란불고죄(知亂不告罪)와 교결역신죄(交結逆臣罪)의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였다. 후일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지평의 운계서원(雲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신(貞信)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榜目
大東韻府群玉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大東韻府群玉
燃藜室記述
[집필자]
이문기(李文基)
성명 : "신변(申抃)"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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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