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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주(鄭復周)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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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사고(師古)
호(號)육괴(肉塊)
생년1367(공민왕 16)
졸년?(미상)
시대조선전기
본관하동(河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지의(鄭之義)

[상세내용]

정복주(鄭復周)
1367년(공민왕 16)∼미상.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하동(河東)(주1)
본관
하동정씨보를 참고하여 본관을 동래(東萊)에서 하동(河東)으로 수정함.
. 자는 사고(師古), 호는 죽당(竹堂)육괴(肉塊).

증조부는 정유(鄭宥)이고, 조부는 정견(鄭堅)이며, 부친은 판사 정지의(鄭之義)(주2)
하동정씨보를 참고하여 부를 정원의(鄭元義)에서 정지의(鄭之義)로 수정함. 조부, 증조부, 외조부, 처부 추가.
이다. 외조부는 보성선씨 선일덕(宣一德)이고, 처부는 재령이씨강양이씨이다.

1402년(태종 2) 형조도관정랑(刑曹都官正郞)으로 재직 중 인심이 불순하다고 논란되고 있는 단주청주(靑州)에 파견될 것을 자청하여, 특별히 중훈대부(中訓大夫)로 가자되면서 지경성군사 겸 지병마방어사(知鏡城郡事兼知兵馬防禦事)에 제수되었다.

그뒤 첨절제사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1406년 본처를 버리고 화산군(花山君) 장사길(張思吉)의 기첩(妓妾)의 딸을 계실(繼室)로 맞아 사헌부로부터 “풍속을 문란시켰으니 치죄하여야 한다.”는 논핵이 있었으나, 태종과의 고려말 이래의 친분으로 면죄되었다.

성격이 활달하고 언변에 능하였으며, 학문과 법의 정통을 주장하고 이단을 배척함에 엄격하였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朝鮮名臣錄
河東鄭氏譜

[집필자]

한충희(韓忠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