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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안인(閔安仁)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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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복(子復)
생년1343(충혜왕 4)
졸년1398(태조 7)
시대조선전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민선(閔璿)
증조부민지(閔漬)

[상세내용]

민안인(閔安仁)
1343년(충혜왕 4)∼1398년(태조 7). 고려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자복(子復).

고려 첨의정승(僉議政丞) 민지(閔漬)의 증손으로,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아들이다.

1365년(공민왕 14) 10월 전리판서(典理判書) 한천(韓蕆) 주재하의 국자감시(國子監試)에서 1등으로 급제, 1374년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에 제수, 그뒤 고려대를 통하여 14년간이나 관직(館職)을 띠고 제고(制誥)에 참여하였다.

1377년(우왕 3)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예의총랑(禮儀摠郞)을 거쳐 전법총랑(典法摠郞)이 되었다가 권귀(權貴)의 뜻을 거슬려 파면, 4년 뒤 군부총랑(軍簿摠郞)으로 복직, 고려말에는 삼사의 좌윤우윤을 역임하였다.

1392년(태조 1) 사은사(謝恩使)문하시랑찬성사 우인열(禹仁烈)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내왕, 귀국 즉시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 곧 교서감감(校書監監)을 거쳐, 평양교수(平壤敎授)로 파견되어 문묘(文廟)를 수리하였고, 학규(學規)를 엄히 하면서 훈회(訓誨)에 전력하는 등 유학진흥과 유교의례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1395년 한성에 태묘(太廟: 종묘)가 세워지면서 예악정비(禮樂整備)의 필요에 따라 전고(典故)에 밝다 하여 특별히 소환되어 국왕의 친관(親祼: 親祭)을 위한 대례(大禮)의 완비에 공헌, 곧 퇴직하여 후진을 교육하면서 여러 학자들의 일고(逸稿)를 수집하여 정리하다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성품이 근면하면서도 질직돈후(質直敦厚)하였고, 고려말에는 제고에 기여하였으며, 조선개국초에는 유학진흥과 의례의 정비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권근(權近)과 교우가 깊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國朝人物考
閔安仁墓誌銘

[집필자]

한충희(韓忠熙)
대표명민안인(閔安仁)
안인(安仁)
성명민안인(閔安仁)
자복(子復)

명 : "안인(安仁)"에 대한 용례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