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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초(自超)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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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무학(無學)
생년1327(충숙왕 14)
졸년1405(태종 5)
시대조선전기
활동분야종교 > 불교인
박인일(朴仁一)
출신지삼기(三岐: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저서『인공음(印空吟)』
저서『무학대사어록(無學大師語錄)』
저서『무학비결(無學祕訣)』
저서『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

[상세내용]

자초(自超)
1327년(충숙왕 14)∼1405년(태종 5). 조선 초기의 고승. 성은 박씨(朴氏). 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헌(溪月軒). 삼기(三岐: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출신. 박인일(朴仁一)의 아들이다.

1344년(충혜왕 5) 출가하여 소지(小止)의 제자가 되었으며, 혜명국사(慧明國師)로부터 불법을 배우며 부도암(浮屠庵)에 머물렀다. 1346년(충목왕 2) 『능엄경(楞嚴經)』을 보다가 깨우친 바가 있었다. 그때부터 진주(鎭州) 길상사(吉祥寺), 묘향산 금강굴(金剛窟) 등에 머무르면서 불도를 닦았다.

1353년(공민왕 2) 원나라 연도(燕都)로 가서 인도승 지공(志空)을 만나 도를 인정받았다. 이듬해 법천사(法泉寺)에서 나옹(懶翁)을 만났는데, 나옹은 그가 큰 그릇임을 간파하였다. 그뒤 무령(霧靈)오대산 등을 거쳐 서산(西山)의 영암사(靈巖寺)로 나옹을 찾아갔으며, 그곳에서 몇 해를 머무르면서 수도하였다. 어느날 그와 선문답(禪問答)을 나눈 나옹은 “서로 안다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하다 하여도 마음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너와 나는 이제 한 집안이다.”라고 하였다.

1356년 나옹을 하직하고 귀국하였으며, 나옹 역시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元曉庵)에 머물렀다. 1359년 다시 나옹을 찾아가자 나옹은 법을 전하는 표시로 불자(拂子)를 주었다. 그뒤 나옹이 신광사(神光寺)로 자리를 옮기자 찾아갔다가, 그곳 대중 속에 그를 꺼리는 사람이 있음을 보고 고달산(高達山)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살았다. 1371년 나옹이 왕사(王師)로 책봉되어 송광사에 머무르면서 의발(衣鉢)을 그에게 전하였다.

1376년(우왕 2) 회암사(檜巖寺)를 크게 중창한 나옹은 그를 불러 수좌(首座)를 삼고자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다. 그해 나옹이 입적하자 전국의 명산을 유력(遊歷)하면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공양왕이 왕사로 삼고자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1392년(태조 1) 겨울, 태조는 그를 왕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이때 태조에게, 유교는 인(仁)을 말하고 불교는 자비를 가르치지만 그 작용이 하나라는 것과, 백성을 자식처럼 보살필 때 백성의 어버이가 되고 나라는 저절로 잘될 수 있음을 설법하였다. 그리고 죄를 지어 옥에 갇힌 사람들을 용서하여 새로운 삶을 열어줄 것을 청원하였다. 태조는 그 청에 따라 죄수를 방면하였고, 그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1393년 왕도(王都)를 옮기려는 태조를 따라 계룡산한양 등을 돌아다니며 지상(地相)을 보고, 마침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는 데 찬성하였다.

1393년 9월에 지공나옹의 사리탑을 회암사에 건립하였고,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불사(佛事)를 광명사(廣明寺)에서 베풀었으며, 10월에는 국가의 주관 아래 대장경을 읽는 전장불사(轉藏佛事)가 연복사(演福寺)에서 개최되었을 때 그 주석(主席)이 되었다.

1397년 태조의 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웠으며, 1398년 용문사(龍門寺)로 들어가서 살았다. 1402년(태종 2) 왕명을 받아 회암사로 옮겼으나, 이듬해 다시 사퇴하고 금강산 진불암(眞佛庵)으로 들어갔다. 1405년 금강암으로 옮겨 그곳에서 나이 78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였다.

자초태조와의 밀접한 관계로 인하여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된 고승이다. 태조와의 관계 중에서도 이성계의 꿈을 풀이하여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이야기, 한양 천도와 관련된 풍수설화 등은 특히 유명하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기화(己和)가 있다.

저서로는 『인공음(印空吟)』 1권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으며, 『무학대사어록(無學大師語錄)』 1권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무학비결(無學祕訣)』이라는 필사본이 있으나, 자초에게 가탁된 위서(僞書)라는 설이 있다. 현존하는 분명한 저서로는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가 있다.

[참고문헌]

東文選
朝鮮金石總覽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집필자]

고익진(高翊晉)
대표명자초(自超)
법명무학(無學), 자초(自超)
무학(無學)

호 : "무학(無學)"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4麓是真宂也時家僮適會窃聴奔告于 上促馬追入於咸關嶺底請之甚懇遂與偕来至誠拜求占得其地二僧長者懶翁少者無學
紀年便攷v6色求無學 上事以師禮問㝎都之地且問藏衣之地無學乃占於楊州曰 殿下世世皆葬於此 上旣卜健元陵回過一峴曰予自此忘
紀年便攷v6色求無學 上事以師禮問㝎都之地且問藏衣之地無學乃占於楊州曰 殿下世世皆葬於此 上旣卜健元陵回過一峴曰予自此忘憂遂名忘㥑峴云
紀年便攷v6厯臨金剛山遜于德源又如咸興後太宗遣使問安冠盖相望而惟成石璘朴淳能導達其情太宗又送無學無學善奏 上颇然之云二臣一僧之事詳見其列傳
紀年便攷v6厯臨金剛山遜于德源又如咸興後太宗遣使問安冠盖相望而惟成石璘朴淳能導達其情太宗又送無學無學善奏 上颇然之云二臣一僧之事詳見其列傳
紀年便攷v6無學居安邉土窟中我太祖微時夢入破屋負三椽而出問土窟僧僧曰身負三椽乃王字也又問花落鏡墜之夢僧曰花落終有實鏡
紀年便攷v6所見而築室於此僧曰三峯當前是謂三印。當有三道方伯掛三印於洞樹三方伯躍進執手與歸 上事以師禮問定都之地無學乃至漢陽曰以仁王作鎭白岳南山為龍虎鄭道傳曰自古帝王南面為治遂主白岳無學曰垂二百年當思吾言新羅僧義相秘
紀年便攷v6 上既卜健元回過一峴曰予自此忘憂遂名忘憂峴云上為上王幸咸興太宗遣使問安冠盖相望無敢導達其情太宗物色求無學送至咸興 上王留與宿語未甞不言太宗之短如此数十日一日夜半進說曰某誠有罪然 殿下愛子已盡殱矣只有此人若
紀年便攷v6無學
紀年便攷v6王字也又問花落鏡墜之夢僧曰花落終有實鏡墜豈無聲太祖大喜且感其言登極後建寺其地名曰釋王令三南方伯物色求無學至谷山高達山掛印松枝以芒鞋抵草菴有一僧着犢鼻禈鉏菜田方伯問何所見而築室於此僧曰三峯當前是謂三印。當有
紀年便攷v6執手與歸 上事以師禮問定都之地無學乃至漢陽曰以仁王作鎭白岳南山為龍虎鄭道傳曰自古帝王南面為治遂主白岳無學曰垂二百年當思吾言新羅僧義相秘記云都漢陽者若聽僧言稍可久存若鄭姓人出而是非之不過五卋蟇奪之禍生歲纔二
紀年便攷v6義相秘記云都漢陽者若聽僧言稍可久存若鄭姓人出而是非之不過五卋蟇奪之禍生歲纔二百板蕩之難至上問蔵衣之地無學乃占地於楊州曰殿下世世皆葬於此 上既卜健元回過一峴曰予自此忘憂遂名忘憂峴云上為上王幸咸興太宗遣使問安
紀年便攷v6橐將㧌之誰與其付他人母寧與我之血屬上曰頗然之遂有回鑾之意然不欲入城初戾逍遙山留数月遂如豊壤因築官而居無學遂不知所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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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