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혜근(惠勤)

[요약정보]

UCIG002+AKS-KHF_12D61CADFCFFFFB1320X0
이명(異名)나옹(懶翁)
이명(異名)혜근(彗勤)
이명(異名)아원혜(牙元惠)
호(號)강월헌(江月軒)
시호(諡號)선각(禪覺)
생년1320(충숙왕 7)
졸년1376(우왕 2)
시대고려후기
활동분야종교 > 불교인
아서구(牙瑞具)
저서『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상세내용]

혜근(惠勤)
1320년(충숙왕 7)∼1376년(우왕 2). 고려말의 고승. 혜근(彗勤)이라고도 쓴다. 성은 아씨(牙氏). 속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 선관서영(善官署令) 아서구(牙瑞具)의 아들이다.
1. 출가와 득도
21세 때 친구의 죽음으로 인하여 무상을 느끼고,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를 찾아가 출가하였다. 그뒤 전국의 이름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에서 대오(大悟)하였다. 그때 이 절에 우거하고 있던 일본석옹(石翁)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2. 순례
1347년(충목왕 3)원나라로 건너가서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인도승 지공(指空)의 지도를 받으며 4년 동안 지내다가 1350년(충정왕 2)에 그의 곁을 떠나 평강부(平江府) 휴휴암(休休庵)에서 한철을 보냈고, 다시 자선사(慈禪寺)의 처림(處林)을 참견(參見)하여 그의 법을 이었다.

이듬해 명주(溟州)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육왕사(育王寺)에서 석가모니상을 예배하였다. 그곳에서 무상(無相)고목영(枯木榮) 등의 승려를 만나 법론(法論)을 벌였고, 1352년에는 복룡산(伏龍山)의 천암장(千巖長)을 찾았다.

그의 소문을 들은 원나라 순제(順帝)연경의 광제선사(廣濟禪寺)주지로 임명하였고, 1356년 10월 15일에는 개당법회(開堂法會)를 가졌다. 순제는 사신을 보내 금란가사(金襴袈裟)를 하사하고 지극한 예우로써 우대하였다.

그러나 순제의 만류를 무릅쓰고 주지직을 내놓은 뒤 다시 지공을 찾아갔다가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였다.
3. 승력
귀국 후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은신하였으나 공민왕과 태후의 간곡한 청에 의하여 잠시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면서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때 홍건족이 잇따라 신광사 주위를 노략질하였지만 법력으로 신광사를 수호할 수 있었다.

그뒤 공부선(功夫選)의 시관(試官)이 되었고, 1361년부터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1371년 왕으로부터 금란가사와 내외법복(內外法服)‧바리를 하사받고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에 봉해졌다.

그뒤 송광사에 있다가 다시 회암사 주지가 되어 절을 중수하였으며, 1376년에는 문수회(文殊會)를 열어 크게 법명을 떨쳤다.
4. 불교관
그는 정도(正道)가 혼침된 고려말의 불교계에 습정균혜(習定均慧)와 근수(勤修)‧지혜로써 성불의 가능성을 보여준 고승으로서, 철저한 불이사상(不二思想)의 토대 위에서 선(禪)을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말의 선풍은 그에 의하여 새롭게 선양되었다. 지공의 선풍이 공해탈선(空解脫禪)의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의 입장을 취하였고, 종래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이나 조계종(曹溪宗)과는 다른 임제(臨濟)의 선풍을 도입하여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의 「귀의자심삼보(歸依自心三寶)」의 주장과 “염불은 곧 참선”이라고 한 것은 이후의 우리나라 선종에서 계속 전승되었다. 계율관(戒律觀)에서도 삼귀의(三歸依)가 아닌 사귀의를 주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계목(戒目)으로는 ① 수정신사귀의(受淨信四歸依), ② 참제제삼업죄(懺除諸三業罪), ③ 발홍서육대원(發弘誓六大願), ④ 최상승무생계(最上乘無生戒)로 나누어져 있다. 이는 일반적인 불교의 5계(戒)나 보살계(菩薩戒)와는 다른 독특한 것이다.

또,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도를 강조하기 위하여 6대서원(六大誓願)을 세우기도 하였다.
5. 평가
그는 고려보우(普愚)와 함께 조선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운 위대한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왕명으로 밀성(密城: 密陽) 영원사(瑩源寺)로 옮기던 중 5월 15일 나이 56세, 법랍 37세로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색(李穡)이 글을 지어 세운 비와 부도가 회암사와 신륵사에 있다.

제자로는 자초(自超)지천(智泉) 등 2,000여명이 있으며, 저서로는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1권과 『가송(歌頌)』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선각(禪覺)이다.

[참고문헌]

懶翁和尙語錄
朝鮮金石總覽 上
東師列傳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집필자]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