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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좌(孛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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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고려시대
활동분야문신 > 문신

[상세내용]

패좌(孛佐)
생졸년 미상.

1202년(신종 5) 10월에 전동경야별초(東京夜別抄) 패좌(孛佐)경주도령(慶州都領) 이비(利備) 등과 함께 동경(東京:지금의 경주)에서 신라의 부흥을 목표로 한 농민반란군을 일으켰다.

패좌는 이때 운문(雲門)‧초전(草田)‧울진(蔚珍)의 초적(草賊)의 무리들을 불러들여 3군으로 나누어 편성하고 스스로 정군병마(正軍兵馬)라 칭하고, 경상도 일대를 점거하였다.

당시 고려 정권의 집권자 최충헌(崔忠獻)초토처치병마중도사(招討處置兵馬中道使) 김척후(金陟侯)를 보내어 토벌하도록 하였다.

1203년 이비기양현(基陽縣:지금의 안동)에서 붙잡히고, 패좌는 무리들을 이끌고 운문산으로 들어가 산적 노릇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김척후가 반란군을 완전히 토벌하지 못하자 그 후임으로 초토사대장군(招討大使將軍) 정언진(丁彦眞)을 대체시켜 토벌하도록 하였다.

1203년 7월에 정언진대정(隊正) 함연수(咸延壽)강숙청(康淑淸)을 운문산으로 보내 주모자였던 패좌에게 안정된 직업을 갖고 편히 살 것을 권유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이 때 패좌 측의 부장(副將)이 함연수에게 계속 눈짓을 하였다. 그러자 함연수는 눈치 빠르게 부장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밖에 나가서 칼을 가져다 패좌의 머리를 참수하여 서울로 보내게 되었으며, 이로써 군사 패좌와 지방관 이비가 조직적으로 일으킨 반란군은 끝이 나게 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國李相國集
東史綱目
新增東國輿地勝覽
朝鮮王朝實錄
朝鮮人名辭書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