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계(鄭熙啓)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D76CACC4D1396X0 |
호(號) | 양성헌(養性軒) |
시호(諡號) | 양경(良景) |
생년 | ?(미상) |
졸년 | 1396(태조 5) |
시대 | 고려후기 |
본관 | 경주(慶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정휘(鄭暉) |
공신호 | 개국공신 |
[관련정보]
[상세내용]
정희계(鄭熙啓)
미상∼1396년(태조 5).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양성헌(養性軒).
문하평리(門下評理) 월성군(月城君) 정휘(鄭暉)의 아들이며, 부인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질녀이다.
공민왕 때 총애를 받아 근시(近侍)가 되었다가 대호군에 이르렀고, 우왕 때 최영(崔瑩)의 막하에 들어가서 서북면도순문사를 거쳐 밀직사에 이르렀다.
최영이 패한 뒤 이성계(李成桂)가 실권을 잡자 그의 인친(姻親)임을 고려하여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에 등용하였으나, 1390년(공양왕 2) 이성계를 해치려는 이른바 이초(李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안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392년 이성계의 도움으로 판개성부사에 이어 문하평리로서 응양위상호군(鷹揚衛上護軍)을 겸임하였다. 이해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여 개국공신 1등으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팔위상장군(八衛上將軍)에 올라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여졌다. 이어 판팔위사(判八衛事)‧좌참찬 등을 거쳐 판한성부사로 죽었다.
학식이 부족하고 사람됨이 가볍다는 세인의 평을 받았다. 개국 당시 세 정씨(鄭氏)가 삼한(三韓)을 멸한다는 도참설이 널리 퍼졌는데, 사람들은 그들이 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정희계를 가리킨다고 믿었다 한다. 시호는 양경(良景)이다.
문하평리(門下評理) 월성군(月城君) 정휘(鄭暉)의 아들이며, 부인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질녀이다.
공민왕 때 총애를 받아 근시(近侍)가 되었다가 대호군에 이르렀고, 우왕 때 최영(崔瑩)의 막하에 들어가서 서북면도순문사를 거쳐 밀직사에 이르렀다.
최영이 패한 뒤 이성계(李成桂)가 실권을 잡자 그의 인친(姻親)임을 고려하여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에 등용하였으나, 1390년(공양왕 2) 이성계를 해치려는 이른바 이초(李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안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392년 이성계의 도움으로 판개성부사에 이어 문하평리로서 응양위상호군(鷹揚衛上護軍)을 겸임하였다. 이해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여 개국공신 1등으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팔위상장군(八衛上將軍)에 올라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여졌다. 이어 판팔위사(判八衛事)‧좌참찬 등을 거쳐 판한성부사로 죽었다.
학식이 부족하고 사람됨이 가볍다는 세인의 평을 받았다. 개국 당시 세 정씨(鄭氏)가 삼한(三韓)을 멸한다는 도참설이 널리 퍼졌는데, 사람들은 그들이 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정희계를 가리킨다고 믿었다 한다. 시호는 양경(良景)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燃藜室記述
太祖實錄
燃藜室記述
[집필자]
한영우(韓永愚)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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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