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습인(鄭習仁)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C2B5C778U9999X0 |
자(字) | 현숙(顯叔) |
생년 | ?(미상) |
졸년 | ?(미상) |
시대 | 고려후기 |
본관 | 초계(草溪)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정공연(鄭公衍) |
조부 | 정방주(鄭邦柱) |
증조부 | 정승(鄭丞) |
[상세내용]
정습인(鄭習仁)
생졸년 미상.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현숙(顯叔).
국자박사(國子博士) 정승(鄭丞)의 증손으로, 조부는 정방주(鄭邦柱)이고, 부친은 정공연(鄭公衍)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학관(成均學官)에 보임되었고, 이어 지영주(知榮州)가 되어 일을 보려 할 때 주리(州吏)가 고사(故事)를 들어 소재도(消灾圖)에 분향하기를 청하므로 “인신(人臣)의 법이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고 하여 이를 철거하였다.
또한, 영주에 무신(無信)이라는 탑이 있었는데, 이를 허물고 그 벽돌로 빈관(賓館)을 수리하여 신돈(辛旽)의 노여움을 사서 계림옥(鷄林獄)에 갇혔다.
신돈이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조정신하들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평민이 되어 영주에 가서 그 탑을 다시 쌓게 하였다. 신돈이 죽은 뒤에 기용되어 다시 지영주가 되고 또 지밀성(知密成)이 되었는데, 이르는 곳마다 지방의 세력가를 누르고 음사(淫祀)를 금하였다.
우왕 때 전교령(典校令)으로 일본 사신에 대한 답례사(答禮使)에 임명되었는데, 일본 사신이 불교를 배척하는 자라 하여 바꾸기를 청하므로 결국 가지 못하였다.
그뒤 어버이의 상을 당하자 여막(廬幕)을 짓고 3년상을 행하는 등 한결같이 주자의 『가례(家禮)』에 따랐다. 공양왕이 즉위하여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제수되었으나 곧 윤구택(尹龜澤)의 고신(告身)에 이름을 쓰지 않았다고 하여 외지로 유배되었다.
국자박사(國子博士) 정승(鄭丞)의 증손으로, 조부는 정방주(鄭邦柱)이고, 부친은 정공연(鄭公衍)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학관(成均學官)에 보임되었고, 이어 지영주(知榮州)가 되어 일을 보려 할 때 주리(州吏)가 고사(故事)를 들어 소재도(消灾圖)에 분향하기를 청하므로 “인신(人臣)의 법이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고 하여 이를 철거하였다.
또한, 영주에 무신(無信)이라는 탑이 있었는데, 이를 허물고 그 벽돌로 빈관(賓館)을 수리하여 신돈(辛旽)의 노여움을 사서 계림옥(鷄林獄)에 갇혔다.
신돈이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조정신하들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평민이 되어 영주에 가서 그 탑을 다시 쌓게 하였다. 신돈이 죽은 뒤에 기용되어 다시 지영주가 되고 또 지밀성(知密成)이 되었는데, 이르는 곳마다 지방의 세력가를 누르고 음사(淫祀)를 금하였다.
우왕 때 전교령(典校令)으로 일본 사신에 대한 답례사(答禮使)에 임명되었는데, 일본 사신이 불교를 배척하는 자라 하여 바꾸기를 청하므로 결국 가지 못하였다.
그뒤 어버이의 상을 당하자 여막(廬幕)을 짓고 3년상을 행하는 등 한결같이 주자의 『가례(家禮)』에 따랐다. 공양왕이 즉위하여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제수되었으나 곧 윤구택(尹龜澤)의 고신(告身)에 이름을 쓰지 않았다고 하여 외지로 유배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萬姓大同譜
高麗史節要
萬姓大同譜
[집필자]
박천식(朴天植)
대표명 | 정습인(鄭習仁) |
성명 | 정습인(鄭習仁) |
성명 : "정습인(鄭習仁)"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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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